ADVERTISEMENT

[사람 사람] 병마와 싸우는 '여자축구 대모'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사상 처음 월드컵 무대에 나섰던 여자축구 대표팀이 3전 전패, 1득점.11실점의 초라한 성적표를 안고 귀국길에 올랐다. 그들이 맞닥뜨린 세계 여자축구의 벽은 두꺼웠다. 낯선 데 선보러 갔다 딱지 맞고 돌아오는 딸을 맞이하듯 국내 지도자들의 가슴도 저리다.

경기도 이천 설봉중 김창기(44)감독도 애간장이 다 녹았다. 그는 1991년 팀을 창단, 월드컵에 출전한 김결실(여주대) 등 10여명의 국가대표를 배출하며 청춘을 여자축구 육성에 바쳤다. 그는 지금 간암 판정을 받아 힘겨운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

金감독은 육신의 고통보다 '내가 여자애들을 붙잡아 축구를 시킨 게 과연 잘한 일인가'하는 자책에 더 괴롭다. 영등포공고에서 주전으로 활약했던 그는 공주사대를 졸업하고 고향 이천으로 교사 발령을 받았다. 축구팀을 만들고 싶어했던 그는 여자팀으로 방향을 잡았다.

당시에는 이화여대.숙명여대에 축구팀이 있어 잘만 하면 그쪽으로 진학시킬 수도 있겠다 싶었다. 91년 5월, 국내에서 둘째로 여중 축구부를 창단했다. 축구를 해본 적이 없는 선수들을 데리고 기본기부터 가르쳤다. 가슴 트래핑을 어떻게 하느냐고 키득거리던 아이들이 점점 '선수'가 돼 갔다.

그러나 그 사이 이대.숙대가 축구부를 해체했고, 졸업한 제자들은 갈 곳이 없어 축구를 그만두기 일쑤였다. 학부모들은 툭하면 "우리 애 운동 안 시키겠다"며 金감독을 흔들어댔다.

이래저래 술이 늘었고, 주독(酒毒)과 스트레스는 金감독의 간을 소리없이 점령해 들어갔다. 간경화를 거쳐 올해 초 '암세포가 온 몸에 퍼졌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올 여름까지 벤치를 지켰다. 지난 추석에는 대학 1년생인 제자 세명이 집을 방문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라고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그는 "너희들이 더 걱정"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달랑 두 개뿐인 실업팀에서 1년에 뽑는 선수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니 쏟아지는 대졸(대부분 2년제) 선수들은 어디로 가야 하나. "문화관광부나 축구협회에서 '여자축구를 지원하겠다'고 하는데, 초.중.고팀을 자꾸 만들어 '희망없는 아이들'을 양산하지 말고 실업팀 두세 개만 더 생기도록 도와주세요. 그럼 저도 여자축구에 바친 세월을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이천=정영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