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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가족] 언성 높이고 욕하면 ‘독’, 공격성 걷어내면 ‘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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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절한 감정 표현 연습하세요 사람은 기쁨·슬픔·분노·불안·두려움 등 다양한 감정을 느낀다. 특히 분노·억울함 같은 부정적 감정은 반복적으로 반추할수록 크기가 커지고 상황을 악화시킨다. 이런 감정을 묵혀 두기만 하면 ‘묻지마 범죄’처럼 곪아 터지고, 내지르면 ‘갑질’ 사건처럼 관계를 한순간에 망가뜨릴  수 있다. 감정을 표현할 때 가장 어려운 것이 수위 조절이다. 감정을 극단적으로 억제·분출하지 않고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도 능력이다.

신체에서 감정을 관장하는 것은 뇌다. 감정을 일으키고 받아들이는 부위가 대뇌의 변연계라면 이 감정을 조절하고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부위는 뇌 앞쪽의 전두엽이다. 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정영철 교수는 “변연계는 감정의 액셀러레이터, 전두엽 피질은 브레이크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부정적 감정 참으려고만 하다간 #우울증·불안증·불면증 생길 수도 #솔직한 대화로 표현하는 게 좋아"

 감정 조절의 가장 손쉬운 방법은 참는 것이다. 의지가 강하고 인내심이 잘 발휘돼야 부정적인 감정이 차오를 때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감정을 잘 억제하는 사람은 꼼꼼한 성격이거나 완벽주의자적인 성향이 강한 편이다.

술 취하면 돌변? 감정 억누르다 폭발한 탓

문제는 감정을 억누르는 데에만 익숙해졌을 때다. 직장인 문주형(가명·39)씨는 회사에서 책임감이 강하고 일 처리를 똑 부러지게 잘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인간미가 없다’ ‘고지식하다’는 얘기를 듣곤 한다. 문씨는 최근 동료에게 의외의 모습을 보여 곤혹스럽다. 회식 자리에서 술에 취해 큰 목소리로 상사에게 소리치고 화를 내서 주위에 있던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는 “평소에 차분하고 과묵하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데 술자리에서 전혀 다른 모습이 나와 나조차 당황스럽다”고 했다.

 감정 억제는 감정을 마음 상자 깊은 곳에 숨기고 상자 뚜껑을 닫아두는 것과 같다. 당장 감정이 보이지 않으니 해결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감정의 부스러기가 쌓일수록 마음 상자에는 더 이상 숨길 공간이 없어진다. 결국 감정이 어떤 형태로든 터져 나온다. 정 교수는 “평소에 얌전하던 사람이 술을 마신 후 돌변하는 등 쌓여 있는 감정이 순간적으로 폭발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상태가 오래되면 몸과 마음에 악영향을 준다. ‘국제임상정신약리학회지’(2014)에 따르면 한국·미국의 우울증 환자(한국인 1592명, 미국인 3744명)를 분석한 결과, 우울증의 정도는 한국인(14.58점)이 미국인(19.95점)보다 낮지만 ‘자살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거나 최근 시도를 한 적이 있다’고 답한 비율은 한국인(6.9%)이 미국인(3.8%)보다 많았다. 연구를 진행한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홍진 교수는 “감정이 억압돼 있고 표현을 잘 안 하면 우울증·불안증·불면·알코올중독 등이 유발될 수 있는데 자살 징후가 나타날 정도가 돼야 알아차리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감정 표현이 계속 차단되면 다른 통로인 신체를 통해 표출되기도 한다. 가톨릭대 의정부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이해국 교수는 “감정이 차오르면 몸은 위기 상황으로 받아들여 맥박이 상승하고 자율신경이 항진된다”며 “심장에 계속 부담이 가고 스트레스 호르몬이 많이 분비된다”고 경고했다.

심장 부담, 스트레스 호르몬 분비 초래

반대로 감정을 숨기지 않고 겉으로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은 건강한 걸까. 감정을 솔직하게 분출하면 감정을 쌓아 두지 않아 빨리 해소된다. 서울대 노화고령사회연구소가 서울에 거주하는 90세 이상 노인 88명을 심층 조사한 결과 남성 72%, 여성 51.6%가 ‘감정 표현을 많이 한다’고 답했다. 감정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스트레스를 줄이고 장수에 도움이 된다는 방증이다. 단 이런 건강한 감정 분출은 스스로 감정의 주도권을 갖고 있을 때 성립된다. 적절한 감정 표출은 원하는 상황에서 정리된 의견을 비폭력적인 대화를 통해 전달하는 것이다. 무작정 화를 내거나 언성을 높이고 욕을 하는 등 가학적인 방식으로 표출하는 것은 감정을 덜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증폭시키는 부작용을 낳는다.

 감정 분출이 극단적인 사람은 정서 표현이나 행동이 과한 측면이 있다. 기분 변화가 주변 사람에 의해 많이 좌우되고 관심받는 것을 좋아한다. 이른바 히스테리성(연극성) 성격인 사람이 주로 그렇다. 전 교수는 “감정 표출이 심한 사람은 대인관계에 갈등이 잦고 감정 기복이 심해지기 쉽다”고 우려했다.

 자기중심적이어서 타인의 기분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감정 분출이 과할 수 있다. 비판이나 무시당한다고 느끼면 자기통제력이 떨어지고 공격 성향이 강해진다. 이 교수는 “감정은 지나치게 억누르거나 분출하지 않는 균형 감각이 중요하다”며 “감정에 무작정 휩쓸리지 않고 적절하게 표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부정적 감정 다스리는 노하우

 믿을 만한 가족·친구 활용하기

부정적인 감정이 들 때 ‘내가 화를 내거나 싫은 소리를 하면 상대방이 나를 미워하겠지’라고 걱정하면 감정을 표현하기 어렵다. 이럴 때 반복해서 연습하면 적절한 수준의 감정 표현을 할 수 있다. 나와 신뢰 관계가 돈독한 가족이나 친구에게 감정을 표현하는 연습을 해본다. ‘감정 표현을 해도 무슨 일이 생기지 않는구나’를 깨달으면 감정 표현의 부담감이 적어진다.

 운동·음악 등 취미로 해소하기

감정 조절이 원활하려면 각성 상태에 있는 뇌를 환기해야 한다. 운동·예술 활동은 뇌의 긴장과 이완의 리듬을 조화롭게 한다. 땀에 흠뻑 젖을 만큼 격렬한 운동을 하거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상상을 그림으로 표현하며 노래방에 가서 목청껏 노래를 부르는 식이다. 이런 활동은 자기 계발의 기회가 될 수 있는 데다 감정 에너지를 건전하게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오감으로 부정적 감정 극복하기

오감은 격렬한 감정을 누그러뜨리는 데 효과적인 수단이다. 추억이 담긴 사진을 꺼내 보고(시각), 좋아하는 꽃향기를 맡으며(후각), 반려동물의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어 본다(촉각). 혀가 얼얼할 정도로 매운 음식을 먹기도 하며(미각),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청각) 감정을 이완시킨다. 단 새로운 자극보다는 익숙하고 위안의 의미가 담긴 매개체를 활용한다.

 디지털 미디어와 거리 두기

게임·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영상 등 미디어는 정보가 방대하고 빠르며 반응이 즉각적이다. 순간순간 드는 감정에 대해 빠른 보상을 해준다. 그러나 이런 활동은 감정을 잠깐 잊어버리게 할 뿐 감정을 해소하거나 행복하고 즐거운 감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크고 작은 자극을 반복적으로 받기 때문에 극적인 감정 변화를 초래할 수 있다.

김선영 기자 kim.suny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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