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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감정' 뛰어넘은 문화재 사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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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타계 이틀 전 한국에서 온 사진을 보고 있는 후지쓰카옹. [과천문화원 제공]

앞줄 왼쪽부터 백승하·임재현·양우철 어린이. 서 있는 사람은 박은주 교사.

5일 오후 5시 서울 수유 4동 강북청소년수련관 2층 강의실. 국어교사 박은주(41)씨가 편지 세 통을 내놓았다. 삼양초등학교 5학년 백승하.임재현.양우철 어린이에게 어렵게 입을 열었다.

"후지쓰카 할아버지의 답장이 왔어요. 여러분 편지를 받고 큰 힘을 얻으셨다고 해요. 몇 번이나 읽어 보셨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한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다리가 돼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슬픈 소식이 있어요. 어젯밤 돌아가셨습니다." 마냥 즐거워하던 아이들이 순간 조용해졌다. 서로 때리며 놀던 장난을 그만뒀다. "일본은 무조건 나쁘다고 믿었어요. 우리나라에 문화재를 기증하신 할아버지를 보고 생각이 달라졌어요. 앞으로 크면 할아버지 묘에 갈 수 있을까요."(백승하) "오늘 받은 편지도 소중한 유물이 될 수 있겠죠. 할아버지 뜻대로 열심히 공부할래요."(양우철)

한국의 어린이들과 일본의 할아버지 사이에 꽃핀 문화재 사랑이 화제다. 아이들은 한국에 문화재를 기증한 할아버지에게 감사의 편지를 썼고, 병석의 할아버지는 조카를 통해 아이들에게 답장을 보내왔다. 그리고 아이들이 답장을 받기 전날,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답장은 할아버지의 유언이 된 셈이다. 아이들은 독도.역사 문제 등으로 나쁘게만 생각했던 일본을 다시 돌아보며 문화의 가치를 깨달았다. 문화교류만이 양국의 오랜 갈등을 푸는 열쇠라고 생각해 온 할아버지는 아이들에게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다.

일본인 할아버지는 역사학자 후지쓰카 아키나오(藤塚明直.94)다. 올 2월 과천문화원에 유물 2700여 점을 기증했다. 그의 아버지 후지쓰카 지카시(藤塚.1879 ~ 1948)가 수집했던 것이다. 추사 김정희(1786 ~ 1856)의 친필 20여 점을 포함, 조선후기 한국과 중국의 석학들에 관련된 자료다. 일본에는 더 이상 추사를 연구하는 학자가 없어 한국에 기증하기로 결정했다. 이런 공로로 5월 한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기도 했다. 그의 부친 또한 1943년 한국에 추사의 '세한도'(국보 180호)를 기증한 것으로 유명하다. <중앙일보 2월 3일자 21면>

아이들은 뉴스를 보고 일본을 다시 공부하게 됐다. 박은주 교사는 "일본에 대한 일방적 적대감은 향후 우리 아이들에게 결코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편지 쓰기를 권유한 것도 이런 생각에서다"고 말했다. 아이들의 편지는 지난달 중순 할아버지에게 배달됐다.

일본 도쿄 외곽의 단칸방에 살았던 후지쓰카는 노환으로 5월 초 병원에 입원했었다. 과천문화원 최종수 원장은 "부인도 자식도 없었던 후지쓰카는 병석에서나마 한국의 손자를 얻은 셈"이라고 말했다. 과천문화원 측은 앞으로 마련할 과천문화회관 후지쓰카 특별실에 이번 편지들을 기증 유물과 함께 전시할 예정이다.

"할아버지께선 당신의 삶을 마감하셨지만 이제 여러분이 그 바통을 이어받아야 해요. 일본은 물론 미국.유럽 등에 다리를 놓는 어린이가 되세요." 선생님의 당부에 아이들이 "예"를 합창했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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