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진압군 "전두환, 특전사들 박탈감 이용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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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광주 금남로에서 시민과 학생들이 군사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대형 버스를 앞세우고 시위하는 학생을 계엄군이 연행해 탱크 앞에서 무릎을 꿇리고 있다. [연합뉴스]

1980년 광주 금남로에서 시민과 학생들이 군사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대형 버스를 앞세우고 시위하는 학생을 계엄군이 연행해 탱크 앞에서 무릎을 꿇리고 있다. [연합뉴스]

1980년 5·18 민주화운동 진압군으로 투입된 공수부대원이 당시 상황에 대한 양심선언을 했다. 1999년 5·18에 대해 처음 증언을 시작한 이경남 목사는 14일 주간지 시사인을 통해 40년 전 있었던 일을 고백했다.

이 목사는 일병 신분으로 11공수여단에 소속돼 1980년 5월 19일 새벽 3시 광주 조선대에 도착해 완전 무장을 했다. 11공수여단은 전날 저녁 커튼으로 창을 가린 기차를 타고 광주로 내려왔다.

"5월 19일 갑자기 통금 당겨…그날 성폭행 많았을 것" 

5·18 광주민주화운동 38주년 기념식을 하루 앞둔 2018년 5월 17일 오후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 일대에서 열린 5·18 민주항쟁 전야제에서 1980년 당시 시위 모습이 재현되고 있다. [뉴스1]

5·18 광주민주화운동 38주년 기념식을 하루 앞둔 2018년 5월 17일 오후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 일대에서 열린 5·18 민주항쟁 전야제에서 1980년 당시 시위 모습이 재현되고 있다. [뉴스1]

그는 19일을 분위기가 본격적으로 험악해진 날로 기억했다.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다루라고 교육받은 군인들이 지나가는 시민과 시위하는 학생들을 곤봉으로 무차별 진압하기 시작했다.

이 목사는 "저녁이 되자 시민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사태가 심각하다고 느낀 부대가 전남도청으로 들어가 자정이던 통금 시간을 밤 9시로 당겼다"고 설명했다.

통금시간은 갑자기 당겨졌다. 그는 "도서관과 학원에서 뒤늦게 귀가하는 여학생들이 성폭행 대상이었을 것"이라며 "5·18 기간 광주에서 일어난 성폭행의 상당수는 5월 19일 밤에 발생했을 것이다"라고 추정했다.

"특전사들 박탈감 이용…봉급 몇 배 올려주기도"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금남로에 배치된 계엄군 병력의 모습. [조광흠 전 조선일보 기자 제공=연합뉴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금남로에 배치된 계엄군 병력의 모습. [조광흠 전 조선일보 기자 제공=연합뉴스]

전두환 신군부가 대학을 나오지 않은 특전사들의 박탈감을 이용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이 목사는 "우리 중대원 중 대학을 다닌 사람은 나뿐이었다"며 "대부분 '민주화', '유신헌법'이 무슨 말인지도 몰랐고 특전사 군인과 시위하는 학생들은 동년배였지만 그들 사이 박탈감과 반감이 컸다. 전두환은 그걸 이용했다"고 주장했다.

이 목사에 따르면 전두환 신군부는 고된 시위 진압 훈련을 받던 특전사들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해 환심을 샀다. 이 목사는 "1980년부터 특전 병사들 봉급 200%와 점프수당 500% 인상을 발표했다. 일병이었던 나도 군 생활을 하면서 돈을 좀 모아 나갈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고 기억했다.

또 신군부는 1공수여단이 1979년 부산·마산 민주화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진압한 사례를 들며 군인들에게 '부마 사태를 모델로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다루라'고 교육했다. 그해 광주에선 군인이 아닌 모든 이들이 군인에게 적, 빨갱이로 간주됐다.

이 목사는 "진압작전 때 (시민들을) 진압봉으로 때리고 군홧발로 짓이겼다. 시민들이 지나가다가 혹시 당신들 공산군 아니냐고, 국군이면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묻더라"고 말했다.

"전두환 회고록 사실 아냐, 권일병 죽는 모습 봤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전남 도청앞 금남로에서 수많은 군중과 버스에 탑승한 시민들이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다. [연합뉴스]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전남 도청앞 금남로에서 수많은 군중과 버스에 탑승한 시민들이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 목사는 '집단 발포'가 있었던 21일 발포의 도화선이 된 권모 일병의 죽음도 생생히 기억한다고 했다.

이 목사는 "나는 21일 오전 10시부터 도청 앞 전일빌딩 입구에서 시위대와 대치했다"며 "전날까지 공수부대의 진압으로 시민 9명이 죽자 시민들은 분노해 있었고 군과 시위대 사이의 협상이 결렬되자 낮 12시 넘어 차량 시위대가 돌진했다"고 전했다.

군은 돌진하는 차량에 화염병을 투척했다. 그래도 이어지는 시위대의 돌진에 군 장갑차가 당황하며 갑자기 후진하다가 권 일병이 바퀴에 깔려 숨졌다는 게 이 목사의 증언이다. 이 목사는 "저지선이 무너지고, 군인은 도망가고 장갑차가 퇴각하니 금남로가 비었다. 시위대가 차량 공격을 시작하자 실탄을 지급받은 지휘관들과 저격수들이 발포했다. 이것이 도청 앞 발포 사건"이라고 말했다.

그날 있었던 집단 발포에 대해 전 전 대통령은 다르게 기억하고 있다. 전 전 대통령은 회고록을 통해 "권 일병이 시위대의 장갑차를 미처 피하지 못해 숨졌다"고 적었다. 시위대가 훔친 장갑차로 도청 앞을 돌진하다 권 일병이 깔려 죽자 11공수여단이 자위권 발동 차원에서 집단 발포를 했다는 주장이다.

이 목사는 전 전 대통령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이 목사는 "정오쯤 차량 시위대가 화염병을 던지며 돌진해 오자 경비 중이던 우리 부대 장갑차가 후진하다 권 일병이 캐터필러 밑으로 깔렸다"며 "권 일병이 입으로 피를 토하며 죽어가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38주년 기념식을 하루 앞둔 2018년 5월 17일 오후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 일대에서 열린 5.18 민주항쟁 전야제에서 5.18 희생자 유족들이 행진을 하고 있다. [뉴스1]

5.18 광주민주화운동 38주년 기념식을 하루 앞둔 2018년 5월 17일 오후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 일대에서 열린 5.18 민주항쟁 전야제에서 5.18 희생자 유족들이 행진을 하고 있다. [뉴스1]

이 목사는 최근 전 전 대통령의 회고록 문제로 재판 중인 고 조비오 신부 측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료를 보냈다. 이 목사는 "전씨 재판부에 1980년 5월21일 도청 앞 집단 발포에 대한 진술서를 써서 보냈다"고 밝혔다. 조 신부의 조카 조영대 신부는 전 전 대통령을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해 형사 재판을 진행 중이다.

정은혜 기자 jeong.eunhye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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