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유국 졸부 학대에 운다|중동에 돈벌러간 동남아 여성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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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고국을 떠나 중동의 산유 부국으로 일자리를 찾아 나선 동남아여성들이 대부분 인간이하의 푸대접 속에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고 있다.
필리핀·스리랑카·인도 등 동남아 지역의 여성들은 인구과잉에다 마땅한 직장을 구하기가 어려워 보다 나은 삶을 꿈꾸며 쿠웨이트·사우디 아라비아 등 중동국가에 대거 몰려가고 있으나 막상 현지에 도착한 후 자신들의 꿈은 여지없이 깨져버린다.
이들 여성들은 대부분 높은 임금을 약속한 전문 모집인 들의 부추김으로 송출돼 현재 중동에는 수십만명이나 진출해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있다.
월1백∼2백 달러의 가정부가 대부분인 이들은 불결한 환경에서 구타를 당하기도 하고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며 심지어는 성폭행을 당하는 경우도 많다는 것.
쿠웨이트의 한 가정에서 가정부로 일하는 「앨리스」(23)라는 필리핀여성은 지난 8개월 동안 모진 매를 맞고 병원에 입원중이다.
그녀는 병원에서『내가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집주인 부부는 내가 무척 아름답게 웃는 모습을 지녔다』면서 반갑게 대했으나 오래지않아 구타를 하기 시작했다고 눈물을 흘렸다.
팔꿈치·다리는 물론 턱까지 부러져 침대에 누워있는「앨리스」양은 『멀쩡하던 치아도 모두 부러졌다. 나는 이곳에 와서 모든 것을 잃었다』고 탄식했다.
감금상태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그녀는 자신의 꿈이 산산 조각난 현실을 원망하기보다는 지난날의 공포에 치를 떨었다.
「앨리스」양의 경우는 그래도 나은 편. 지난해 한 쿠웨이트 여성은 가정부 살해혐의로 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심한 고문 끝에 제대로 치료를 하지 않아 가정부가 사망했던 것.
쿠웨이트 주재 아시아 외교관들은 스리랑카 출신 가정부를 불에 달군 철근으로 46군데나 지진 악독한 쿠웨이트주인과 4년 동안 봉급 한푼 지불 받지 못한 또 다른 스리랑카 여성에 관한 예를 들려주었다.
금년 4월 사우디 아라비아의 제다에서는「레나·린다·예니다」라는 필리핀 여성이 아기를 질식시켜 죽인 혐의로 처형됐다.
그녀는 돈을 훔쳤다는 주인 측의 모함에 분을 못 이겨 자신이 돌보던 아기를 죽여버렸던 것.
쿠웨이트의 영자지 아랍타임스 데일리는 최근 외국인 가정부에 대한 가혹 행위가 지난 4∼5년간 급증 하고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가정부를 고용하는 일이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으며 이는 지위의 상징인양 여겨지고 있다』고 꼬집었다.
필리핀과 스리랑카에서 최근 일자리를 찾아오는 여성들이 크게 늘어남에 따라 이들에 대한 잔학행위도 증가하고 있다고 외교관들은 말했다.
한 인도 외교관은 갑자기 돈을 번 아랍인들 중에는 다른 사회의 여성들을 대하는데 문화적으로 미숙한 것 같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중동국가에 거주하는 동남아출신 가정부 수는 나라마다 다르다.
1백70만명의 인구를 가진 쿠웨이트 정부는 자국에 약19만6천명의 가정부가 살고있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알루난·글랑」쿠웨이트 주재 필리핀대사는 이들 중 3분의2가 필리핀여성이라고 말하고 그러나 이들 중 7천명만이 적법한 거주자라고 말했다. 그는 『하루에 40명 이상의 필리핀 여성이 정식 서류도 없이 쿠웨이트로 몰러오고 있다』고 덧붙였다.
스리랑카 외교관들은 82년 이후 자국출신 가정부가 3배나 늘어나 쿠웨이트에 약6만명, 아랍에미리트 연합에 약7만명, 그리고 사우디 아라비아에는 약10만명 살고 있다고 전했다.
전통적으로 중동지역의 인력 공급국이던 인도로부터도 상당한 여성이 진출해있다.
사회적으로 매우 민감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중동언론들은 최근 외국인 가정부에 대한 가혹행위를 보도하기 시작했다.
아랍 타임스지는 최근 주인이 휘두른 호스로 얼굴이 짓이겨진 스리랑카출신 가정부의 얼굴을 보도했는가 하면 사우디 아라비아 신문들도 제다시 경찰간부의 말을 인용, 주인의 학대를 피해 달아나는 가정부가 늘고 있다고 전했다.
「글랑」필리핀 대사는 필리핀 가정부 중 10%는 어떤 형태로든 학대를 받고있으며 강간도 이따금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스리랑카의 한 외교관도 15건 가량의 가혹행위가 매일 대사관에 고발되고있다고 전하고 인도외교관들도 구타행위는 일상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자국여성들에 대한 이 같은 불법행위에 대처, 동남아 각국은 최근 각양의 조치를 마련하고 있다.
방글라데시는 83년 이후 중동국가에 대해서는 자국여성에 대해 취업사증을 일체 거부하고 있으며 인도정부도 가정부사증을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
필리핀 정부는 중동국가들의 보장이 없는 한 가정부 취업을 금지하고 있다.
한편 쿠웨이트 등 중동국가들은 가정부들에 대한 임금지급을 보증하기 위해 가정부고용을 원하는 자국인에게 5천 디나르(약1천1백만원)를 예치토록 하는 법안을 마련했다. 【AP 연합=본사특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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