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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현기의 시시각각

가증의 인사청문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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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현기 기자 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1 미국 의회에서 인사청문회가 열리는 상원 위원회실은 반원에 가까운 말발굽 모양으로 돼 있다. 위원장이 가운데 앉고 의원들이 좌우로 배치된다. 얼마 전 워싱턴의 의회 전문가로부터 “미 의회에서 삿대질이 없는 데는 말발굽 배치가 한 몫 한다”란 흥미로운 분석을 들었다. 인사청문회 후보자 좌석은 전방 정면. 의원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후보자로 가게 돼 있다. 우리처럼 여야가 정면으로 마주 보고 앉는 배치가 아니다 보니 싸울 일도 줄어든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이유가 있다. 의원석의 높이다.

미국, 인준 거부 230년 동안 9명 #한국, 보고서 미채택 23개월 18명 #가증의 청문회 끝낼 제도 마련해야

미 의회는 후보자나 증인이 앉는 자리보다 의원들 좌석 높이를 50cm정도 높게 했다. 특권의식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게 그렇지 않다. 그만한 격에 어울리는 질문, 태도를 보여야 하는 엄청난 심적 부담을 안기게 한다. 우리도 미국처럼 하면 어떻게 될까. 그런데도 ‘밑’에 있는 사람 따위 신경쓰지 않고 서로 삿대질하며 고함칠까.

#2 우리 인사청문회에서 나오는 발언은 판에 박힌 내용들이다. 자료 왜 제출 안 하느냐, 왜 부동산 불법(편법) 거래했느냐, 주식투자가 과하지 않느냐, 왜 논문 표절 했느냐, 자식을 왜 그렇게 키웠느냐…. 오로지 흠결 파기다. 이유는 간단하다. 1787년 인사청문회를 도입한 미국의 것을 배우겠다면서 제대로 배우질 못했다. 미국은 그런 신상과 흠결은 후보자를 지명하기 전에 미리 거른다. 연방수사국(FBI), 국세청, 정부윤리위원회에서 2~3개월에 걸쳐 샅샅이 뒤진다. 기준에 벗어나면 아예 대통령이 후보자로 지명하질 못한다. 그러니 진짜 인사청문회에선 정책 비전이나 소신 검증에 집중한다.

이달 초 신임 국토안보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케빈 매컬리넌. 그는 FBI 제출용 ‘표준양식 86’, 모든 금융거래 내역을 해명하는 ‘표준양식 278’, 그리고 19개의 핵심 항목을 주관식으로 훑는 ‘백악관 개인정보 신고’를 냈다. 1000쪽에 가깝다. FBI는 아예 그가 15년 동안 살았던 모든 동네의 이웃들을 찾아 평판까지 확인했다. 이렇게 철저히 하니 인사청문회에서 인준 거부당한 각료 후보자는 약 230년 동안 불과 9명. 우리는 어떨까. 문재인 정권 출범 23개월 동안 국회에서의 청문 보고서 미채택은 18명이다. ‘230년에 9명 대 23개월에 18명’이란 극단적 대비는 뭘 뜻할까.

#3 결국은 대안 마련이다. 아무리 문제가 드러나도 “임명권은 대통령에 있다”로 퉁 쳐버린다면 영영 이 모양이다. 청문회를 할 필요가 없다. 근본적 대안은 대통령 아닌 의회에 인준 권한을 주는 것이다. “국회의원들이 그런 감량이 되느냐”, “대통령은 허수아비로 남으란 소리냐”는 지적이 나올 순 있다. 청와대도 그리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제도로 보완하면 된다. 후보자의 신상을 사전에 검증하는 중립적 비공개 위원회를 설치, 철저히 거른 뒤 통과된 후보자 정보를 의회에 제공하면 된다. 그래야 난도질 인사청문회를 거부하는 많은 훌륭한 인재들도 ‘일단 도전!’에 나설 수 있다. 또 진짜 인사청문회에서 그 후보자에 대한 정책 비전만을 다룰 수 있게 된다. 국회에 인준 권한을 주면 대통령의 긴장감도 높아진다. 대강대강 못하게 된다. 국회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무턱대고 인준에 반대할 수 없게 된다. 정쟁을 목적으로 한 반대는 그대로 노출되기 때문이다. 정치 선진화란 그런 것이다.

조국 민정수석의 검증 부실과 문재인 대통령의 임명 강행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빠져나갈 구멍이 있으니 그런 게다. 그러니 청와대에 이어 이젠 후보자들까지 뻔뻔하게 인사청문회를 우습게 안다. 지나가는 소나기 정도로 안다.

청문회를 지켜보는 국민들만 수치를 느낀다. 이런 가증의 반복을 막는 유일한 길은 결국 제도를 바꾸는 일이다. 여야가 의지를 보인다고 하니 지켜볼 일이다. 이 구멍을 메우는 데 너무 오래 걸렸다.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