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조 백일장 9월] 초대시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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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 가을 속으로 떠나다 - 조동화

한기가 척후병처럼 숨어드는 자정 무렵
거대한 안개 군단이 마을을 엄습한다
여름과 동서남북을 순식간에 지워버리며

결국 또 이렇게 떠날 때가 된 것이다
적당한 게으름과 무기력의 포구로부터
더 깊은 우울과 침잠, 더 낮은 나를 찾아

서둘러 거룻배에 올라 밤새 노를 저어간다
아득히 열려오는 내 안의 먼 먼 바다
눈부신 벌레 소리가 고물 가득 쌓인다

<시작노트>

더위가 한풀 꺾이고 밤만 되면 기온이 급강하하면서 뒷산에서 자욱한 안개군단이 마을로 내려온다. 어느새 가을이 온 것이다. 벌써 스물 몇해째 경주에서 살고 있지만 고도(古都)의 가을이 자욱한 밤 안개와 더불어 온다는 사실을 안 것은 근년에 이르러서다. 그리고 바로 이때부터 벌레소리가 더 높고 맑으며 윤기가 흐른다는 사실도….

남부를 강타한 매미의 상처가 아직도 도처에 널렸지만 이제 또 무기력을 털고 거룻배 한 척을 띄울 때가 되었다. 거년(去年) 이맘 때처럼 오늘밤도 눈부신 벌레소리는 고물 가득 쌓일 것이다.

<약력>

▶1948년 경북 구미 출생 ▶7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시집 '낙화암' '낮은 물소리' 등 ▶현재 초록숲 문예창작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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