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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복 연애소설>우리 결혼식에 '마법의 성'이 울려퍼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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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이정권 기자]

[일러스트 이정권 기자]

제30회(마지막회)

이제 남은 건 엄마를 설득하는 일이었다. 나는 있는 그대로 다 말하기로 했다.
“엄마, 오늘 저녁에 드릴 말씀이 있어요.”
“울 아드님이 뭔데 이리 출근길에 미리 예고까지 하시나...”
나는 엄마를 와락 안아드렸다. 그리고 돌아서 대문을 향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결혼문제요.”
“그래? 새 여자가 생긴 거야?"
“아니에요....”
집을 나서는데 코끝이 쌔했다. 가족이라곤 엄마뿐이다. 하루 종일 마음이 무거웠다. 새 여자냐는 반응 때문이었다.

결론은 났으니 빨리 보고 싶구나
저녁은 팀원들과 예정된 회식을 하고 9시쯤 귀가했다.
“천아, 편하게 얘기하자꾸나. 그리고 너무 길게 얘기하지 않아도 된다. 네가 그 동안 얼마나 마음고생하는지 옆에서 다 지켜봤으니까.”
엄마는 시작부터 그렇게 아들을 편하게 만들어줬다.

“고마워요, 엄마. 저 정말 누나를 좋아하고, 누나도 마침내 받아들였어요.”
“아침에 네가, 새 여자가 아니라고 하기에 역시 답은 정해져 있구나 생각했다. 어차피 결론은 났으니 빨리 보고 싶구나.”
엄마는 더 없이 쿨했다. 더 이상의 기대는 포기하신 걸까.

“엄마, 혹시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그런 심정이에요?”
“하하. 그래 보이냐? 답을 하자면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

나는 최대한 빨리 1주일 뒤로 날을 잡았다. 누나는 나보다 여섯 살 많지만 겉으론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상견례 하는 식당에 먼저 와 있던 누나는 오늘 더 우아해 보였다. 옅은 갈색 치마를 입고, 노란 스웨터에 연두색 재킷을 걸쳤다. 계절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센스였다. 누나는 파스텔톤을 좋아했다.

-마침내 이런 날이 오네.
나는 들뜬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생수를 거푸 두 잔 마셨다. 누나를 보면서도 당연히 엄마의 표정에 더 관심이 쏠렸다. 순간 나는 안도했다. 상당히 흡족한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이무명이라고 합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제가 흠이 많지만 예쁘게 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반가워요. 나도 얘기 많이 들었어요. 참 단아하게 생겼네. 너무 고와요."
엄마는 꽤나 마음에 들어 했다.
"참 맘에 드는구나. 괜히 걱정했구나."
누나가 잠깐 화장실 간 사이,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40년, 그 중 30년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온 나는 하늘을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엄마와의 자리를 마친 뒤 나는 누나와 카페에서 마주 앉았다.
“결혼식은 김천기획사에서 완벽하게 준비할 테니, 신부는 아무 걱정 말고 계세요.”
누나는 행사의 전권을 위임하겠다고 했다. 그래도 날짜는 둘이 정해야 했다.

“앞으로 한 달 뒤 첫째 토요일 오후 5시 어때요?”
“그렇게 빨리? 필요한 거 혼자 다 준비할 수 있겠어?”
누나는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아주 작은 결혼식이기 때문에 문제 없어요. 작지만 의미는 어마무시한…하하하.”

아, 꿈 같은 결혼식!
7월16일, 마침내 결혼식이다. 나의 여신이라 부르는 누나를 중앙도서관에서 본 지 정확히 2년 되는 날이다. 그 730일 동안 나는 얼마나 달뜬 나날을 보냈던가. 실망하고 좌절하는 날도 많았다. 어쩌면 그런 곡절 없이 이런 화려한 순간을 맞을 순 없으리라.

식장은 누나가 온 정성을 쏟고 있는 양평 어린이집, 주례는 없이 하기로 했다. 사회는 심리상담센터를 하는 그 선배에게 맡겼다. 누나를 다시 만나 결혼까지 골인하는 데는 그 선배 역할도 작지 않았다. 양가를 대표하는 어른은 엄마와 누나의 이복언니였다. 하객은 누나를 세상에 하나뿐인 선생님으로 추앙하는 꼬마들 21명이었다. 아이들 부모도 열 명쯤 초대했다. 그리고 석 달 전 사장님과 결혼한 대학동창 장서희 팀장도 불렀다. 사장님도 같이 왔다.

축가는 누나에게 물어 노래 잘하는 남녀 어린이 둘을 섭외했다. 축가는 나의 요구에 의해 '마법의 성'으로 정해졌다. 꼬마 싱어 둘을 데리고 그동안 노래방에 열 번 이상 간 걸 누구도 모른다.
하객으로 참석한 아이들에겐 새 옷을 하나씩 선물로 준비했다. 천사 같은 아이들이 뿌리는 종이꽃 세례를 받으며 결혼식은 막을 내렸다.

누나는 신혼여행은 연말쯤 가자고 했다. 순록이 뛰노는 핀란드로. 나는 무조건 찬성했다. 당장 신혼여행을 준비하지 않아도 되니 너무 여유 있어 좋았다. 우리는 엄마가 잡아준 남산의 반얀트리 호텔로 향했다. 남산은 물론 강남을 굽어보는 야경이 더 없이 근사했다. 이른바 첫날 밤, 나는 나의 신부에게 특별히 준비한 선물을 내놓았다.

"이게 뭐야? 반지야?"
"나도 잘 모르겠어요. 신부님, 열어보세요."
"신부님이라 하니 누가 들으면 성당 신부님인 줄 알겠다, 얘."
"하늘 같은 신랑님에게 얘가 뭡니까?"
누나는 깔깔대며 포장을 뜯었다.

딱 반지가 들어갈 작은 상자에서 USB가 나왔다.
"뭐야, 이게?"
"다이아반지가 아니라 실망하셨어요, 고객님?"
나는 준비한 노트북 PC를 누나에게 건넸다.

-- 타인이 쓴 자서전 --
첫 화면에 이런 제목이 나타났다.
누나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다음 페이지를 클릭했다.

〈그녀는 미쳤다. 그렇다고 미친년이라고 부르면 곤란하다. 글에 미친 여자에게 그런 호칭은 그다지 적절치 않기 때문이다. 클래식이나 야구, 도박에 미친 사람은 꽤 흔하지만 글에 미쳤다고? 그런 사람도 다 있나...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 눈에 그녀는 확실히 미쳤다. 글이 완벽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 한다. 어느 정도냐 하면, 마음에 안 드는 글을 잡고 씨름하다 생리대 갈아야 할 타임을 놓쳐 의자가 젖기도 했단다. 이건 내가 지어낸 얘기가 아니다. 그녀 입으로 직접 한 말이다.〉

도입부를 잠깐 읽은 누나는 얼굴이 벌겋게 상기됐다. 한참 동안 할 말을 잃은 표정이었다.
"이거 누가 쓴 거야?"
"설마 남의 글을 훔쳐 선물이라고 받치진 않겠죠."
"정말? 이 정도인 줄은 몰랐어. 내가 우리 신랑을 너무 과소평가했나 봐. 호호호."
"다 선생님 덕이죠.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며 배운...ㅋㅋ"

누나는 흥분돼 가슴이 마구 뛴다고 했다. 나는 그냥 한번 써본 글이니 누나가 손을 봐서 공모전 같은데 출품해 보라고 했다.
"무슨 소리야? 말도 안 돼. 이건 엄연히 김천 예비작가님 작품이라구."
"읽어보면 손 볼 데가 많을 거에요. 길이도 좀 짧고. 앞으로 누나가 스토리 라인도 더 탄탄하게 만들어 보세요."

그 덕에 누나는 첫날밤에 해야 할을 잊은 듯했다. 한 시간쯤 걸려 다 읽은 누나는 한잔 하자고 했다.
"이 좋은 날, 또 선생님의 지적질을 받아야 한다고요?"
"어떻게 이렇게 멋진 선물을 생각했어? 우리 신랑, 너무 이쁘다. 이리 와, 내가 뽀뽀해 줄게."
우리는 한참을 침대에서 뒹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정말 대박이야, 대박!!"
누나는 진심으로 좋아했다.
"물론 손 볼 데는 꽤 있지만 지금 상태로도 너무 훌륭해. 나는 내 얘기라 아무리 기를 써도 이렇게 쓸 수는 없을 거야. 물론 한번도 쓸 생각조차 안 해 봤지만. 그 동안 나를 엄청 세밀하게 관찰하고 연구했구만. 심리학도답게. 호호호. 마침내 우리 집에 작가님이 나셨네. 작가님이!!"

누나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딸에게 기대한 걸 사위가 해냈다며 좋아하실 거라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저 청년이랑 결혼하라고 하셨구나..."
우리는 근사한 호텔방에서 와인을 마시면서 이슥하도록 작법과 문장론에 대해 얘기했다. 누나는 확실히 글에 미친 여자였다.

이상해...있어야 할 게 없어
누나는 다시 한남동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의 신혼집으로. 옥수동 엄마 집에서 멀지도 않고, 매일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하는 나를 고려하면 양평은 아무래도 무리라고 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자신은 오전 10시까지 양평 어린이집으로 가면 되니까 큰 문제 없다고 했다.

"이상해...."
결혼 후 한달 쯤 지난 어느 날 누나는 묘한 얼굴로 말했다.
"뭐가요?"
"....있어야 할 게 없어."
"아, 그거 혹시?"
"얘는 무슨...?"
"또 얘래. 하늘 같은 서방님한테."
"네 서방님, 근데 그게 아무래도 느낌이 좀 그러하옵니다."

누나는 그제서야 지난달에도 생리가 없었다고 털어놨다. 나는 당장 누나의 손을 끌고 병원으로 갔다. 임신이었다. 양평으로 달려가 결혼하러 왔다고 한 그날, 우리의 생각이 마침내 합일점에 이른 그날이었다. 누나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나는 쾌재를 부르고 또 불렀다. 엄마에게 미리 당겨서 지고 있던 크나큰 부채에서도 벗어났으니까.

나는 당장 양평 어린이집 일을 멈추면 좋겠다고 했다. 누나는 강하게 반대했다.
"아이들과 한 약속을 나 편하자고 쉽게 어길 순 없어. 내가 안 오면 그 아이들은 크게 실망할 거야."
"아이들에게 사정 얘기를 하면 다 이해할 거예요. 제발....."

그 주말 나는 누나 손을 잡고 양평으로 갔다. 맛있는 케이크를 다섯 개나 사 들고.
"아니, 벌써 애기 가졌다구요? 선생님 속도 위반이에요!"
"선생님은 법을 잘 지켜야 하는 거 아닌가요? ㅋㅋ"
"선생님, 아들이에요, 딸이에요?"
아이들의 환호와 웃음소리가 환한 들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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