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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복 연애소설> 난 누나를 와락 안았다 "결혼하러 왔어요"

중앙일보

입력

[일러스트 이정권 기자]

[일러스트 이정권 기자]

제29회

때는 바야흐로 계절의 여왕, 양평 가는 길이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연록색으로 덮인 대지는 대도시와는 판이했다. 녹색 천지에 빈틈이 있다 싶으면 영락없이 철쭉이나 꽃매화, 배꽃이나 조팝나무가 메우고 있었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 다른 데서 사는 생각을 해본 적 없던 나는 신세계가 지척에 있음을 그제야 알았다.

전철로 겨우 1시간 남짓 거리에. 한가지 흠이라면 뿌연 대기였다. 일기예보에선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 수치가 핵심이 된 지 이미 오래였다. 물은 골라 마실 수 있지만 공기는 그렇지 않았다. 그럼에도 정부는 중국에 무슨 빚이라도 졌는지 말 한마디 못하고 있었다.

양수리역에서 택시를 타고 선배에게 받은 주소를 대고, 누나가 일하는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시간은 오후 1시를 막 지나고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누나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지금 누나 일하는 곳에 왔어요."

한참 동안 아무 대답이 없었다. 전화를 할까 하다 급한 일도 아니니 그냥 주위를 둘러보기로 했다. 그런데 미리 알리지 않고 온 것이 그리 잘한 일은 아니었다. 허름한 2층 건물 1층에 자리 잡은 어린이집을 둘러보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는 누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 앞에는 다문화 가정 엄마가 보였다. 안에서 나를 발견하기 전에 얼른 몸을 피했다. 누나는 아이 엄마와 상담하다 또 속상한 사연을 접한 것 같았다.

나 오늘, 결혼하러 왔어요!
거의 2시쯤 누나의 문자를 받았다.
"어쩐 일? 반갑지만 이렇게 연락도 없이 불쑥 오면 곤란한데...할 일도 많고."
"그냥 오고 싶어 왔어요. 급한 거 없으니 일 다 보면 문자 다시 주세요."

20분 뒤 누나가 나타났다. 나는 누나를 와락 안았다. 그리고 귀에 대고 속삭였다.
"보고 싶었어요."
"........"
헤어진 뒤 첫 만남, 약 7개월만의 재회였다.

"내가 오늘 왜 왔는지 아세요?"
"심심하니 왔겠지 뭐. 봄 나들이도 하고...이런 걸 두고 님도 보고 뽕도 딴다 하나? 호호호"
누나는 의외로 금세 기분이 좋아진 거 같았다.
"아뇨, 매우 심각한 일을 하러 왔는데요."
"무슨...?"
"결혼!"
내 목소리엔 힘이 실려 있었다. 톤이 평소완 다른 걸 알고 누나는 약간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누나랑 결혼하러 왔다고요!"
나는 누나를 다시 안았다. 누나는 놀라지 않았고, 날 내치지도 않았다. 물리적인 시간은 10초쯤 됐을까. 하지만 그 10초가 화학반응을 일으켜 확장된 시간은 가늠하기 어려웠다.

"너무 힘들어....날 좀 잡아줘."
누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나는 그 순간 마침내 합일점에 도달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울지 말아요, 누나. 누나를 잡아주려고 내가 왔잖아요."

우리는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누나는 아직 점심도 먹지 않았다고 했다.
샐러드 하나와 봉골레 파스타, 버섯리조또를 시켰다.

"오면서 누나가 점심 전인지 후인지 생각했는데 역시 예상대로네요."
"나, 지금 시간이 많지 않아. 다른 애들이 또 기다리고 있거든."
주말에도 식당이나 비닐하우스에 일 나가는 엄마들을 대신해 아이들을 돌봐준다고 했다.
"그럼 가서 마저 일 보고 오세요..... 아니다, 내가 같이 가서 도와줄게요"
누나는 마다하지 않는 눈빛이었다.

선생님 둘이 결혼해요!
방에는 6~ 9세 되는 아이들이 8명 모여 있었다.
"자, 오늘은 누가 먼저 재미있었던 일 얘기해 볼까?"
선생님 말씀에 두 명이 손을 들었다. 처음엔 시켜도 절대 하지 않던 아이들이 요즘은 먼저 말하려고 한다고 했다. 가르치고 연습한 덕이란다. 기분 좋았던 일을 얘기하면 누나가 칭찬과 함께 과자도 준다고 했다.

누나의 지목을 받은 한 아이가 일어났다.
"아까 여기로 오는 길에 어떤 아저씨가 옷이 예쁘다고 해 기분이 좋았어요. 그래서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했어요."
다른 아이는 어제 나비를 그려오라는 숙제를 잘 해서 오늘 학교에서 칭찬받았다고 했다.

전화를 받으러 누나가 잠깐 밖으로 나간 새 내가 아이들 앞으로 나섰다.
"오늘 새로 온 선생님이에요. 이름은 김천이고. 여기서 잠깐 지켜 봤는데, 나도 여러분과 매일 함께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어요."
그러자 한 아이가 답했다.
"선생님도 우리랑 매일 같이 지내요."

"아, 그러고 싶지만 그건 좀 어려워. 그래도 매주 토요일은 여기로 올게요."
아이들은 와~~하고 박수를 쳤다.
"아직 선생님이 어떤 사람인지 모를 텐데, 그래도 좋아요?"
"우리는 척 보면 알아요. 선생님은 좋은 사람이에요. 근데 선생님, 선생님이 우리 선생님 좋아하지요?"
허를 찔린 셈이었다.

"하하...좋아하는지 어떻게 알아요?"
"눈빛만 보면 알 수 있어요. 아까부터 뒤에 서서 우리 선생님만 쳐다보고 있었잖아요."
좋아하는 감정은 숨길 수 없다고 하더니 정말 그랬나. 아이들이 뭘 알겠느냐며 경계심 없이 있다가 제대로 들킨 것 같았다.

"그러면 같이 결혼할 거예요?"
요즘 아이들은 도저히 못 당하겠다 싶었다.
그때 누나가 들어왔다.

결혼하면 축가 불러줄래요?
"선생님, 새로 온 저 선생님이랑 결혼해요!!"
아이들은 누가 시킨 양 여기저기서 한 목소리를 냈다. 누나는 날 쳐다봤다. 그새 뭘 어떻게 했길래 아이들이 저러느냐는 눈치였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아무 짓도 안 했다는 시늉을 했다. 누나는 빙그레 웃었다.

"선생님이 결혼하면 여러분이 축하노래 불러줄래요?"
"네!!!"
꼬맹이들은 합창을 하듯 힘껏 대답했다.

어린이집 일을 다 마치고 오후 5시쯤 누나가 모는 소나타를 타고 누나집으로 갔다. 그 멋진 노란색 벤츠는 팔았다고 했다. 옥수동 집은 전세 주고 이곳에 전세를 얻은 25평 타운하우스는 아늑했다. 무엇보다 채광이 좋았다. 지은 지 2년쯤 지나서 새집증후군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손님이 올 것 같아 어제 마침 장을 좀 봐 놓은 게 있어."
"내가 올 줄 알았다고요?"
"야, 니가 손님이냐, 남친이지.호호호"
확실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이런 너스레를 떠는 누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누나는 팔을 걷어붙이고 저녁을 준비하겠다고 했다. 나는 극구 말렸다.
"주말에도 내내 일하고 막 들어왔는데, 무슨 밥을 해요? 밖에 나가요. 이 동네 근사한 식당도 많던데..."

그럼에도 누나는 간단한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누나의 그런 행동은 내 청혼에 대한 답처럼 다가왔다.
막 지은 잡곡밥에 냉이국과 불고기, 멸치볶음, 계란후라이, 김으로 저녁상이 차려졌다.
"양평 와서는 혼자서도 잘 해 먹어, 이것저것 맛있게. 천이를 위해 이렇게 연습했나....호호호"

저녁을 먹고 누나는 우아하게 와인상도 차렸다. 정성껏 촛불도 켜고, 방에는 향수도 뿌렸다.
"누나, 이젠 석 잔 원칙도 버렸어요?"
"요즘 누가 그렇게 무식하게 술을 먹냐? ㅎㅎㅎ"

누나는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이곳으로 오면서 많은 게 달라졌다고 했다. 술버릇도 그렇고, 마인드 셋팅도 적극적으로 한다고 했다. 긍정으로 무장하고, 열심히 웃으려고 노력한다는 것이었다.
"아이들과 나 자신을 위해서였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이게 다 천이를 위해서였나....호호호"

그날밤 나는 온 정성을 다해 한 여인의 몸과 마음을 어루만졌다. 마음을 활짝 연 누나의 터치 또한 나를 천상으로 이끌었다,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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