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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복 연애소설> "꿩 대신 닭인가?" 분위기가 쌔 해졌다

중앙일보

입력

[일러스트 이정권 기자]

[일러스트 이정권 기자]

제27회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
이런 말을 들은 적은 꽤 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생각했는데 그런 일이 실제 내게 일어났다. 누나의 긴 얘기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바로 이거였다.

텅 빈 가슴에 헛수고란 단어가 꽉 들어찼다. 지난 1년 3개월의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생각을 바꿔 먹기로 했다. 누나 말대로, 정말 나를 아껴서 그런 결정을 한 것이라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었다. 너무 억울할 것 같았다. 그동안의 열정과 노력이.... 마침내 30대 후반에 참으로 곡절은 많았지만 그럴듯한 연애 한번 했다고 자위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의 여신을 추억의 책장 사이에 접어 넣기로 단단히 마음먹었다.

회사 일은 어떻게 생각하면 막 잘 될 것 같은데 현실에선 꼭 그렇게 되진 않았다. 하긴 모든 일이 그랬다. 잘 될 것 같은 일이 갑자기 일그러지는가 하면 뜻밖의 다른 곳에서 문제가 풀리기도 했다. 의외성이 삶을 채우는 요소라는 평소 생각이 틀리지 않는 것 같았다. 회사 일이든 개인사건 내 맘대로 된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나. 예상 밖 인물이 내 자리를 빼앗아 들어오고, 굳게 믿던 내 편이 결정적인 순간에 배신하는 경우도 보았다.

조직은 역시 별의별 인간들이 다 모여있는 곳이었다. 내가 혼자 잘해도 그 공이 온전히 내게 돌아오는 건 아니었다. 잘 나간다 싶으면 질시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게 조직의 생리였다. 굴러들어온 돌이었기에 이런저런 일들을 더 많이 겪는 것인지도 몰랐다.

회사, 그 씁쓸한 일터
내가 맡은 팀의 실적이 튀어 오르자 다른 팀에서는 장서희 기획팀장이 일방적으로 밀어줘서 그렇다는 식으로 소문이 돌았다. 그럴 때 장 팀장은 당당하게 제 목소리를 냈다.

"다른 팀에게도 '나는 여자다'라는 KBK방송 프로그램을 맡겨봤지만 반응이 그저 그랬어요. 그런데 김천 팀장은 적극적이었죠. 그래서 나는 필요한 지원을 했습니다."

장 팀장과 내가 대학 동기라는 사실을 알고 흠집을 내려는 의도였다. 그녀는 그런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지지했다. 누나를 잊기 위해 나는 더욱더 회사 일에 매달렸다. 연말에 우리 팀은 300% 특별상여금을 받았다. 장사하는 사람은 돈 버는 일이 가장 재미있고, 회사원은 실적을 많이 내 보너스를 받을 때가 제일 좋다. 나는 그 돈을 고스란히 엄마에게 갖다 드렸다. 그러면서 차일피일 미뤄왔던 누나 문제를 '보고'했다.

"전에 말한 누나 있잖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인연이 아닌 것 같아 헤어졌어요."
".....그래……? 그후 아무 소리도 없길래 일이 잘 안 되고 있구나, 짐작은 했다만…. 엄마가 탐탁잖게 반응한 것도 영향을 주었지?"
"아니에요, 엄마. 그 전에도 고민 많이 했다고 했잖아요. 서로 부담을 느껴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겠다는 결론에 도달했어요."

내내 짝사랑만 하다 결국 누나에게 차였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엄마는 속으론 다행이라고 여길 가능성이 매우 높다. 지난 두 달간 언제 누나를 인사시킬 것인지 한 번도 묻지 않았던 엄마다. 마음에 들었다면 당연히 독촉했을 텐데 말이다.
"어쨌든 참 안 됐구나. 우리 아들이 그렇게 좋아했다는데 아무 결실이 없어서……."

이제 며칠만 있으면 또 한 해가 간다. 그러면 마흔이 된다. 세상에 시간 만큼 공평한 것은 없다. 흔히 나이든 어른들이 세월 참 빠르다고 하지만 젊은이들도 다르지 않다. 눈 떴다가 감으면 일주일이 훌쩍 가버렸다고 한다. 부자나 권력자라고 더 많은 시간을 향유하지는 못한다. 아무리 돈 많은 사람도 시간을 살 수는 없다. 장기이식처럼 건강을 사는 건 어느 정도 가능해진 세상이지만 말이다.

나는 장 팀장에게 저녁을 같이 먹자고 했다.
"이 회사 온 지 벌써 1년 됐어. 장서희 덕분에 참 쉽게 정착했어. 그리고 이게 우리의 3학년 마지막 해이기도 하고. 그래서 오늘 저녁 먹자고 했어."
"그럼 오늘도 조심해야겠네. 호호"
전에 둘이 한잔하고 귀가하던 중 내게 일어난 택시사고를 떠올리며 농 삼아 하는 말이었다.

우리가 결혼하면 사람들이 뭐라 할까
"우리가 이렇게 만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그래서 인생은 의외성 빼면 빈 병 같은 거라고 했잖아."
"너 그 말…. ?”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멋지게 생긴 청년인데…”

그녀는 내가 전에 술 취해 의외성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은 적이 있다고 했다.
“내가 그랬다고? 그런데 그걸 기억하고 있네…”
“그럴듯한 이론이었으니까”
“이론이 아니라 현실이지. 우리가 이 나이에 이렇게 한 회사에서 만나 한잔하고 있잖아…하하. 그나저나 혹시 우리 둘이 결혼하면 회사 사람들이 뭐라 할까?"

와인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장 팀장 눈이 동그래졌다.
"응? 무슨 소리야? 그러면 아마 대학 친구가 싱글인 걸 알고 위장 취업해 꿈을 이뤘다고 하지 않을까?"
그녀는 그렇게 순발력 있게 받았다.
“역시 재치 만점 장서희야.”
"ㅎㅎㅎ.... 그런데 웬 그리 심한 농담을? 누나와는 잘 안 되나?"
"….말 그대로 누나잖아. 누나하고 어떻게 결혼해? ....사실 우리 헤어졌어."
"......아 그랬구나. 참 안 됐네. 그래서 꿩 대신 닭?"

"무슨 소릴 그렇게 해. 나도 장서희 좋아한다구. 단지 누나와의 약속이 먼저라서 머뭇거렸을 뿐이지."
"약속? 그냥 혼자 들이댔고 누나는 늘 그냥 그랬다며?"
"아니, 전에 장 팀장이 나랑 사귀자고 한 적도 있잖아. 내가 조금 늦게 답하는 것뿐인데...."
"그쪽이 안 되니까 나라는 식은 좀 곤란하지....."
갑자기 분위기가 쌔해 졌다.
"아 쏘리, 쏘리. 내 생각이 쫌쫌....그냥 해본 소리야. 하하"

장 팀장이 그렇게 나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 새 남친이라도 생긴 걸까. 나는 머쓱해져 자리를 정리하려고 하는데 장 팀장이 분위기를 바꾸는 한마디를 뱉었다.
"사실 내게 뉴스가 있어."
"뉴스?"
".......나, 연애 중이야. 결혼을 전제로."
"아, 그래? 정말 축하해. 어떤 사람이야?"
"너도 잘 아는...."

순간 나는 머리를 막 굴려보았다.
"나도 안다고? 누구지?'
아무리 생각해도 안 떠올랐다. 나는 누구냐고 빨리 말하라고 재촉했다.
"놀랄걸..., 무척..."
"아니, 누군데? 빨리 말해 봐."
"너도 잘 아는 사람이라고…."

뭐, 사장님과 결혼한다고?
장 팀장은 계속 빼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누군데?"
".......사장님....."

나는 화들짝 놀랐다.
-장서희가 돌싱 사장님과 결혼을 한다고? 무려 14년 연상인데…….
돌멩이로 머리를 한 방 맞은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린 나는 와인 한 병을 새로 시켰다.
"역시 장서희야. 이런 빅뉴스, 굿 뉴스를 만들 줄이야. 축하해, 진심으로."

채여서 잠시 썰렁했던 분위기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되었다. 늘 나를 돕는 친구가 사장님 부인이 된다니 이 아니 기쁜 일인가.
장 팀장은 내년 봄에 결혼할 계획이라고 했다.
-세상일, 참 재미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장서희는 내가 손짓만 하면 언제든 달려올 줄 알았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나도 모르게 맥없는 미소가 입가로 새어 나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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