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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매치기인 줄 알았는데… 우즈벡 여인의 '마음 선물'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박재희의 발로 쓰는 여행기(20)

우즈베키스탄의 히바(Khiva)를 대표하는 이찬 칼라(Itchan Kala)에서는 시간을 유영하듯 몽롱해진다. 3000년에 이르는 문명 지층을 증거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이찬 칼라는 잃어버린 호레즘(Khorezm) 문명을 증거한다. [사진 박재희]

우즈베키스탄의 히바(Khiva)를 대표하는 이찬 칼라(Itchan Kala)에서는 시간을 유영하듯 몽롱해진다. 3000년에 이르는 문명 지층을 증거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이찬 칼라는 잃어버린 호레즘(Khorezm) 문명을 증거한다. [사진 박재희]

그가 다가온다. 아까부터 집요하고 서늘한 눈길을 보내던 여인이다. 파란 히잡을 반쯤 내려쓴 그는 내가 이찬 칼라(Itchan Kala)의 주마사원에 들어설 때부터 노골적으로 쳐다봤다. 난 회랑을 돌면서 곁눈으로 여인을 살폈다. 그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최대한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현금 파우치의 지퍼를 확인한 후 겨드랑이로 꼭 안았다.

우즈베키스탄은 1991년 소련연방에서 독립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학습 단계고 지하 경제가 아직은 공공연하다. 타슈켄트행 비행기에서 넥타이 공장을 운영한다는 사업가를 만났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즈베크에서는 은행에 가서 환전하면 바보예요.”

정부거래가 아니면 모두 암달러상을 통한다더니 정말 그럴 만했다. 당시 공식 환율이 1달러당 3000숨(cum)이었는데 ‘따블 숨, 따블 달라’를 외치며 나를 불러 세웠던 아저씨는 달러당 6000숨으로 계산해 주었다. 50달러 한장을 건네고 지폐를 100장씩 묶은 커다란 돈뭉치 세 개를 건네받았다. 쥐기도 어려울 만큼 어마어마한 부피의 현금. 갑자기 부자라도 된 기분이었다. 빵빵한 현금으로 부풀었던 마음은 내 뒤로 따라붙는 여인 때문에 불안감에 터질 지경이었다.

“너 다시 왔네? you come again?”
어랏. 잔뜩 긴장한 내게 그가 영어로 말을 걸었다. 그는 내가 몇 시간 전에 왔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예수 탄생 600년 전에 태어난 조로아스터를 믿는 종교의 전통 위에 실크로드의 마지막 오아시스로서 세계의 중심이던 2000년 전 문명이 포개져 녹아있다. [사진 박재희]

예수 탄생 600년 전에 태어난 조로아스터를 믿는 종교의 전통 위에 실크로드의 마지막 오아시스로서 세계의 중심이던 2000년 전 문명이 포개져 녹아있다. [사진 박재희]

히바(Khiva)는 인류가 만들어낸 최초의 문명길, 실크로드의 마지막 오아시스로 세계의 중심지였다. 지난 3000년 동안 켜켜이 쌓인 문명의 지층이 남아있다. 예수가 태어나기 600년 전 탄생한 조로아스터교의 전통이 일상에 녹아 있고, 고대 페르시아 유적과 이슬람 문명까지 모두 섞여 있는 이 사막 도시는 그 자체로 박물관인 셈이다. 199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이찬 칼라를 관광하려면 공인 해설사의 안내를 받는다. 나도 문화해설사가 이끄는 그룹에 끼어서 주마사원을 둘러봤다.

히바는 먼지만 날리는 사막의 한가운데로 보이지만, 빛나는 실크로드의 오아시스였다. 모든 문화와 첨단 트렌드가 모여드는 곳이었다. 그리고 대수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그의 저서에서 알지브라(algebra), 이름에서 알고리즘(algorithm)이라는 용어가 나올 만큼 위대한 과학자였던 알 호리즈미(Al Xorezmy)의 고향이기도 하다.

옛날 영화 ‘대장 부리바’의 율 부리너를 연상시켰던 해설사의 안내로 이찬 칼라의 아름다운 모스크와 메드레세를 돌아보았다. 두터운 시간의 더께만큼 역사와 전설이 스며있는 고대 도시는 구석까지 아름답고 신비로웠지만 내 마음은 자꾸 주마사원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룹과 헤어진 후 주량의 기둥을 한번 만져볼 요량으로 사원에 다시 온 것이었다.

불안을 감추고 최대한 친절한 표정을 지으면서 현금 파우치를 다시 한번 겨드랑이로 눌러 단도리를 했다. 그는 내게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까레아. 한국 사람이에요.”
“대장금. 나 대장금 좋아해.”

어랏. 노골적으로 나를 뒤쫓으며 불안하게 만들었던 그의 눈에 하트가 들어 있었다. 감탄사와 함께 엄지를 척 올려준 다음 내가 우물쭈물하는데 그가 팔을 잡아끌며 말했다.
“사진 찍어. Photo Photo.”

주마사원. 한 번에 5000명이 동시에 예배를 볼 수 있는 주마 사원에는 213개의 기둥이 있다.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사상과 문명을 반영하듯 기둥에는 십자가와 천사, 심지어 태극 문양까지 새겨져 있다. [사진 박재희]

주마사원. 한 번에 5000명이 동시에 예배를 볼 수 있는 주마 사원에는 213개의 기둥이 있다.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사상과 문명을 반영하듯 기둥에는 십자가와 천사, 심지어 태극 문양까지 새겨져 있다. [사진 박재희]

아니 이런 반전 캐릭터를 봤나. 무언가 노리는 표정으로(이건 나의 건방지기 짝이 없는 몰이해였음을 고백한다.) 긴장시켰던 그가 수줍게 웃으며 사진 모델을 자처했다. 말을 걸고 싶어서 망설이며 타이밍을 엿보던 여인을 소매치기로 의심했다니. 미안했다. 난 일부러 과장되고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했고 그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깔깔댔다.

“예브, 활짝 웃어.”
계속 입을 가리던 그의 손가락을 치우자 입속이 번쩍 번쩍인다. 윗니가 모두 황금이다. 힙합 전사도 아니고 사막 한가운데 사는 중년 여자에게 황금니가 웬 말인가?

“어머. 넌 이가 모두 금이네.”
그가 시무룩해졌다. 중앙아시아에서 불과 10여 년 전까지도 금니는 부의 상징이고 유행이었다. 기혼 여인이라면 금니 열 개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아, 그 여자 시집 잘 갔구나~’ 했다니까. 요즘은 더는 황금니를 하지 않는다. 예브는 황금니를 부끄러워했고 나는 그런 그가 안타까워 연거푸 예쁘다며 거짓말로 달랬다.

“유 보이? You Boy?”
무슨 소린지 헤매다가 겨우 통했다. 자기는 딸 넷에 아들이 하나 있다며 내게 아들이 있냐고 묻는 말이었다. 난 고개를 저었다. 내게 아들이 없다는 말에 예브가 펄쩍 뛰었다. 나는 웃는데 그는 울상이다. 안타까운 얼굴로 나를 토닥이더니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시늉까지 한다.

우즈베크 여인에게 아들을 낳는 것은 아직도 중대한 문제이다. 평균 16살이면 결혼해서 아이를 낳기 시작했는데 요즘 늦어져 18~20세에 첫아이를 낳는다. 믿거나 말거나 13명의 아이를 낳고 14번째 아들을 낳은 여인도 있단다. 21세기에도 아들을 낳는 생산의 의무를 지고 사는 예브들이 마음 아팠다.

헤어지려 할 때, 예브가 자신의 바느질 바구니에서 조그만 주머니를 집어 내밀었다. 그는 사원 안에서 엽서와 수예품을 파는 여인이다. 장사도 접고 나와 놀아준 친구 예브. 당연히 후한 가격으로 사줄 참이었다.
“그래. 예쁘다. 얼마야?”
“선물로 주는 거야. 공짜야.”
“…… 아냐. 그럴 수는 없어. 내가 살게. 얼만지 알려줘.”

기원전 2000년부터 농업과 가축사육을 했고 기원전 9세기에 이미 토담집 형태를 주거지를 가졌던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도시 히바(Khiva). 거기에 사는 사람들. [사진 박재희]

기원전 2000년부터 농업과 가축사육을 했고 기원전 9세기에 이미 토담집 형태를 주거지를 가졌던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도시 히바(Khiva). 거기에 사는 사람들. [사진 박재희]

그는 ‘No(아냐)’와 ‘Free(공짜야)’를 연발하며 손사래를 쳤고 나는 부끄러웠다. 빤히 쳐다본다는 이유만으로 그가 내 지갑을 노린다고 의심하지 않았던가. 여러 번 실랑이 후에도 예브는 팔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난 터질 것 같은 파우치에서 넉넉히 집히는 대로 꺼낸 돈을 예브에게 건넸다. 그는 잠시 주춤하더니 웃음을 거두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선물이야. 공짜로 주는 거야.”

가난하고 불우한 사람은 나였다. 알량한 GNP, GDP가 뭐라고 소매치기로 의심하더니 이제는 선물로 주고 싶다는 마음조차 거부하는 꼴이 아닌가. 더는 사양할 수 없었다. 그를 꼭 안고 볼 인사를 했다.
“예브, 고마워. 정말 예쁘게 만들었다. 라흐맛. 촉 라흐맛.”

종일 앉아 수놓는 그가 하루에 그것을 몇 개나 만드는지, 얼마에 팔고 얼마나 버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거칠고 갈라진 손톱을 가진 예브가 나보다 훨씬 보드랍고 화사한 마음을 가졌음을, 외지에서 찾아온 사람을 반기고 마음 열어 축복하며 살고 있음을 알 뿐이다.

낯선 옛 문명도 신비로웠지만, 유적보다 나를 더 매료시킨 주체는 사람들이었다. 히바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사람들은 목화를 키우고, 빵을 만든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젊은 아빠는 아이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친다. 예브처럼 이찬 칼라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이 웃었다. 수줍게, 그리고 가끔은 짓궂게 깔깔대며. 돌려받지 못할 대상에게 선뜻 좋은 것을 나눠줄 수 있는 부자 마음을 지니고 말이다.

박재희 기업인·여행 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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