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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어놓은 등산화도 슬쩍! 민타로 산장엔 소매치기 새가 있다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박재희의 발로 쓰는 여행기(17)

민타로 호수가 있는 산장까지 16.5km를 걸었다. 눈앞에서 그대로 꺾인 나무를 지나는 방법(위). 고사리는 나무보다 더 크게 자라기도 한다. 나뭇잎이 쌓여 푹신한 길을 걸어 깊은 숲으로 들어간다(아래). [사진 박재희]

민타로 호수가 있는 산장까지 16.5km를 걸었다. 눈앞에서 그대로 꺾인 나무를 지나는 방법(위). 고사리는 나무보다 더 크게 자라기도 한다. 나뭇잎이 쌓여 푹신한 길을 걸어 깊은 숲으로 들어간다(아래). [사진 박재희]

민타로 호수가 있는 산장까지 16.5㎞를 걷는 날이다. 한국에서 날다람쥐처럼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는 비교적 평평한 길이라지만 계속 이어지는 경사로는 절대 만만치 않았다. 깊고 두터운 숲길에서 고사리가 나무처럼 자라고 이끼는 거목을 덮고 있다. 원시림을 걷는 동안 푹신하게 땅이 밟히는 소리와 숨소리만 번갈아 들려왔다.

고요함이 압도하는 숲길에서 유쾌한 사귐을 청한 존재는 로빈(Robin)이라는 새다. 로빈은 친절하고 호기심이 많은 새다. 걷다가 멈추면 다가와 등산화 위로 폴짝 뛰어올라 빤히 지켜보기도 했다. 겁도 없이 사람에게 말을 건네는 새. 노래하기보다 말하는 새, 로빈이 클린톤 계곡에 살고 있었다.

호기심이 많고 사람에게 경계심이 없는 새 로빈(Robin)은 숲을 걷는 동안 다가와 말을 건네듯 지저귀고 먹을 것을 요청하기도 한다. [사진 박재희]

호기심이 많고 사람에게 경계심이 없는 새 로빈(Robin)은 숲을 걷는 동안 다가와 말을 건네듯 지저귀고 먹을 것을 요청하기도 한다. [사진 박재희]

6㎞쯤 오르막을 지나면 산사태로 강을 막아 생긴 호수 데드 레이크(Dead Lake)가 나타난다. 호수에는 너도밤나무가 잠겨 있고 장어와 송어가 헤엄치고 있어 낚싯대를 드리우는 사람도 종종 볼 수 있다. 1000m가 넘는 바위산이 만년설을 이고 서 있는 계곡, 빙하가 녹아 생긴 폭포는 음표를 그려 넣은 듯 일정한 간격으로 수없이 흘러내렸다. 걷다 보면 느닷없이 ‘우루루 꽝~’ 하늘을 뒤흔드는 천둥소리가 계곡을 울렸다. 햇살이 창창한 날의 눈사태였다.

어떤 분께서 “있으라~”해서 만들었다는 자연을 도저히 사람의 말로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자연으로 우리는 깊이 들어갔다. 산사태가 만들어낸 어마어마한 절개지를 지나 숨이 턱을 넘도록 오르막을 가로지르면 맥키논 패스와 폼폴로나 빙하 지역이 올려다보인다. 민타로 호수로 향하는 둘째 날은 각오했던 것보다 힘들었다.

데드레이크(Dead Lake)산사태로 강을 막아 생긴 호수이다. 호수에는 지역에서 자라던 너도밤나무가 그대로 물에 잠겨있다. [사진 박재희]

데드레이크(Dead Lake)산사태로 강을 막아 생긴 호수이다. 호수에는 지역에서 자라던 너도밤나무가 그대로 물에 잠겨있다. [사진 박재희]

캡틴은 계속 원정대의 배낭에서 무언가를 꺼내 자기 배낭에 넣으며 뒤로 쳐지는 사람의 짐을 줄였다. 너무 지친다 싶을 때 우리는 공연히 웃었고 과장해서 실없는 농담을 나누기도 했다. 함께 걷는 친구들의 에너지에 기대서 겨우겨우 민타로 산장에 도착했다.

민타로 산장에서 가장 먼저 요란한 환영 인사를 건네는 존재는 바로 키아(Kea) 새들이다. 등산화 한 짝쯤은 너끈히 물고 날아가고 방문객의 소지품을 노리는 녀석들이다. 산장 안내원은 소지품에 주의하라고 계속 경고를 하였다. 키아는 머리가 좋고 힘이 세서 무엇이든 물어간다. 신발 끈을 서로 묶어 무겁게 만들어 두거나 오두막 안으로 들여놓지 않으면 맨발로 트레킹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수집 취미가 있는 키아는 등산스틱을 끌고 가보려고 안간힘을 쓰기도 한다. 키아에게 등산화와 스틱을 빼앗기지 않도록 단단히 묶어 오두막에 들여놓고 우리는 몸을 씻으려고 호수를 향해 내려갔다. 산장 가까운 곳에 클린톤 강의 시작점인 민타로 빙하호수가 있다.

“가끔은 찍지 않아. 어떤 순간은 오로지 나만을 위해, 카메라로 방해받고 싶지 않아. 그저 순간에 머물고 싶지.”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에서 전설적인 사진가 숀 오코넬이 평생 찾아 헤매던 눈표범을 앞에 두고 한 말이다. 그날, 우리가 민타로 호수에 도착했을 때 미동도 없이 얼어붙었던 원정대의 제이가 탄식과 함께 쏟아낸 말이기도 했다. 민타로 호수를 마주한 바위산 절벽이 병풍처럼 서 있는 모래사장에서 스카이라인을 바라보며 우리는 말은 잊고 비명만 쏟아냈다.

홍수와 산사태로 만들어진 널따란 절개지를 걷는다. [사진 박재희]

홍수와 산사태로 만들어진 널따란 절개지를 걷는다. [사진 박재희]

환호성을 지르며 흥분으로 겅중겅중 걷지도 뛰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아름답다거나 멋있다는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풍광 앞에 우리가 허둥대며 흥분을 어쩌지 못하는 동안 자리에서 기둥처럼 멈춰 서있던 제이에게 우리도 월터가 했던 것과 같은 질문을 했던 것 같다.
“왜 사진 안 찍어요?”

포토저널리스트인 제이가 민타로 호수에서 사진기를 그냥 내려놓았던 모습은 우리에게 오랫동안 잊을 수 없는 순간으로 남아있다. 평소 심각한 분위기라면 질색을 하는 제이인데 놀랍게도 웃음이 전혀 섞이지 않은 얼굴로 말했었다.
“카메라로 방해받고 싶지 않아요. 그냥 이 순간 이대로 있을래요.”

언젠가부터 우린 사진기부터 꺼낸다. 믿을 수 없이 멋진 풍경에도,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한 미소를 마주 볼 때도, 먹을 때도, 우리는 늘 카메라와 휴대폰에 소중한 그 시간을, 간격을 내주고 렌즈로 시선을 가린다. 하지만 우리는 그날 온전히 존재하는 기쁨을 누렸다. 어차피 사진으로는 1만분의 1만큼도 잡을 수 없으리라는 것도 알았다.

빙하가 녹은 물이 1천미터가 넘는 산위에서 떨어진다. 실처럼 가느다란 폭포가 계속 이어졌다. [사진 박재희]

빙하가 녹은 물이 1천미터가 넘는 산위에서 떨어진다. 실처럼 가느다란 폭포가 계속 이어졌다. [사진 박재희]

우리는 만년설과 빙하가 녹아내려 빙점에 가까운 호숫물로 뛰어들었다. 얼음 슬러시에 마비된 척추를 타고 머리 꼭대기까지 차갑고도 뜨거운 전류가 오르내렸다. 정신이 나간 사람들처럼 빙하호수에 퐁당퐁당 몸을 담그며 우리는 계곡을 울리는 비명과 탄성을 질렀다. 땀과 함께 지난 시간이 떨어져 나가는 듯했다.

한밤중에 화장실에 가고 싶어 깼는데 창밖이 환하다. ‘누가 랜턴이라도 매달아 둔 건가?’’ 비몽사몽. 천근만근 눈꺼풀을 들고 밖으로 나오다가 난 너무 놀라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별.
별.
별……

별이 산장 마당에 가득 들어와 있었다. 별은 멀리 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별은 내 코앞에 있었고, 머리 위에 있었고, 어떤 별은 뺨에 닿았다. 무수히 많은 별. 너무 밝고 커다랗게 빛나서 무서울 지경인 별들. 민타로 산장을 덮은 하늘과 산 위에서 별이 내려와 마당에 가득 쌓였다.

별은 저 멀리서 반짝이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옆에서 쿵쿵 심장 뛰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난 그때 산장 마당에 내려온 별 속에서 조금 울었던 것 같다. 세상에, 내가 정말 우주에 살고 있었다! (계속)

박재희 기업인·여행 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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