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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ㆍ일 관계, 기타와 피아노 앙상블처럼 배려로 풀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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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기타와 피아노의 앙상블을 위해 쓰인 곡은 없어요. 편곡으로 함께 연주할 곡을 만들고, 또 상대방의 소리를 잘 들으며 내 소리를 맞추는 것이죠. 한·일 관계도 그런 배려가 필요합니다. 수학 공식으로 풀 문제는 아니니까요."

다음달 16일 일본의 기타리스트와 함께 도쿄 하마리큐 아사히홀에서 공연하는 피아니스트 이경미(57ㆍ경남대 교수)를 지난 12일 도쿄의 찻집에서 만났다.

최악 한일관계 속 도쿄 공연 피아니스트 이경미 인터뷰 #25년 전 만난 연주, 투병 동반자 日 기타리스트와 공연 #"상대방 소리 먼저 듣고 내 소리 맞춰야 앙상블 완성" #NHK가 연습 과정에 밀착 취재, 보수 산케이도 관심 #"음악이 외교에 역할해야" 지인 조언에 공연 앞당겨

5월16일 도쿄의 하마리큐 아사히홀에서 일본인 기타리스트와 공연하는 피아니스트 이경미 교수. [이경미 교수 제공]

5월16일 도쿄의 하마리큐 아사히홀에서 일본인 기타리스트와 공연하는 피아니스트 이경미 교수. [이경미 교수 제공]

함께 공연하는 기타리스트 무라지 가오리(村治佳織·41)는 그에겐 '막내동생'과 같은 존재다. 25년 전 음악축제가 열린 이탈리아 시에나에서 우연히 만난 뒤 서로의 인생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됐다.

가장 가혹했던 시절에도 둘은 서로에게 의지했다. 2009년 이경미가 유방암 판정을 받았을 때도, 3년 뒤엔 무라지가 설암과 싸울 때도 둘은 서울과 도쿄를 오가며 서로에게 힘이 됐다.

"더 나이 들기 전에 둘 만의 추억을 한 번 더 만들자"는 취지로 출발한 이번 공연은 처음엔 11월로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음악이 양국관계에 빨리 역할을 해달라", "일본의 새 일왕이 즉위하는 5월이 좋겠다"는 지인들의 권유로 일정을 당겼다. 공연에서 무라지는 로드리고의 ‘아랑훼스 협주곡’ 을 이경미의 피아노 반주로 연주한다. 후반부엔 이경미가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을 관악4중주와 협연한다. NHK가 연주회 준비 전 과정을 밀착 취재하는 등 일본 내 관심도 뜨겁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일본에서 졸업했고, 아오야마대에서 국제정치학 공부도 했다.   
"과거 일본 대사관에서 근무했던 아버지를 따라 일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무라지 가오리와의 첫 대면을 기억하나.  
"25년 전 이탈리아에서 서로 길을 찾고 있었다. 동양인이 별로 없는 곳에서 어린 소녀가 기타를 들고 서 있는 게 너무 인상적이었다. 그 다음해인가 가오리가 독주회를 위해 한국에 왔는데 통역이 갑자기 못 오게 돼 한밤중에 내게 도움을 청했다. 하루 종일 무라지를 위해 통역을 했고, 서로 마음을 열게 됐다. 서울에선 여러 번 공연을 함께 했고, 일본에선 이번이 세 번째다."
두 분의 암 투병 스토리도 유명하다.   
"2009년엔 내 수술 소식을 들은 가오리가 달려왔다. 이럴수록 화려한 옷을 입어야 한다고 분홍색 옷도 사 왔다. 3년 뒤엔 가오리가 투병할 때는 내가 일본에 가서 온천, 레스토랑을 함께 다녔다. 난 재작년 완치 판정을 받았고, 가오리도 완치됐다."
2011년 재기 무대도 일본 산토리홀 공연이었다.  
"암 판정을 받고 2년간은 정말 힘들었다. 밖에도 잘 안 나가고 잠도 못 잤다. 그런데 일본 공연을 도왔던 일본인 매니저가 ‘다시 피아노를 쳐야 한다’고 독려하며 다짜고짜 산토리홀을 빌렸다. 그래서 '죽더라도 이건 하고 죽어야겠다'는 심정으로 두 달간 연습하고 재기했다. "  
5월 16일 도쿄에서 열리는 피아니스트 이경미와 기타리스트 무라지 가오리의 공연 안내 포스터.

5월 16일 도쿄에서 열리는 피아니스트 이경미와 기타리스트 무라지 가오리의 공연 안내 포스터.

최악의 한일관계 때문에 공연이 더 주목받는 것 같다.  
"11월에 하려고 했는데 오구라 가즈오(小倉和夫ㆍ80) 전 주한일본대사 등 주변 분들이 ‘이왕이면 지금이 어떠냐’고 권유했다. 한일관계를 개선해야 한다고 누구나 말하면서도 나서는 사람이 없다고 하더라. ‘음악이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에 일정을 앞당기게 됐다."
한·일관계 개선을 위한 조언이 있다면.   
"우리 둘은 연주를 할 때 언제나 자기의 소리보다 상대방의 소리를 들어준다. 그래야 부드럽고 절묘한 음색이 만들어진다. 기타는 악기도 작고 소리도 작고 섬세하다. 반대로 피아노는 크다. 오케스트라 반주곡을 피아노 반주곡으로 편곡하고, 또 상대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불가능할 것 같던 연주도 가능해진다. 한·일관계에도 이런 배려가 필요하다."
배려 외에 필요한 게 있다면.   
"전쟁과 지진의 영향인지 일본인들은 경계심이 많다. 마음을 잘 열지 않는다. 10년이 지나야 조금 마음을 연다. 솔직히 이번에 (주일) 대사가 바뀌었는데, 2년 만에 바뀌는 건 좀 아닌 것 같다. 누가 하더라도 갑자기 좋아지지는 않는다. 기다릴 필요가 있다."
일본 내 기대도 뜨겁다.  
 "NHK는 서울과 도쿄에서의 연습 과정까지 모두 취재하고 있다. 공연 다음날 뉴스에 생방송으로 출연한다. 또 (한국에 비판적인) 산케이 신문도 인터뷰를 크게 실었다. 저희도 깜짝 놀라고 있다. 재일동포 친구들이 많은데 여기서 살기가 참 불편하다. 우리가 정치인은 아니지만, 일본에서 열심히 사는 동포 친구들이 원한다면 무엇이든 하고 싶다."

도쿄=서승욱 특파원 ss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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