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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여유, 나의 여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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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송우영 JTBC 사회2부 기자

송우영 JTBC 사회2부 기자

서울중앙지방법원 건물에서 창밖을 내려다보면 예쁜 꽃과 싱그러운 풀들이 보인다. 항상 잘 관리되는 이 법원 앞 작은 잔디밭에는 누구나 앉을 수 있는 벤치도 몇 개 있다. “저기 앉아 잠깐 머리를 식히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끔 하지만 실천에 옮긴 적은 한 번도 없다. 생각해보니 법원에 온종일 상주하는 법조 기자가 된 지 4개월째지만, 벤치에 누가 앉아 있는 걸 본 적은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가끔은 예쁜 꽃들이 아깝다는 생각도 든다.

빌려준 돈을 못 받아 억울한 마음에 소송을 낸 아주머니도, 구속의 갈림길에 선 피고인을 변호하러 온 바쁜 변호사도 그런 여유는 없는 것 같다. 일이 많아 야근은 물론 주말에도 서류를 보러 출근한다는 판사들도, 주요 재판을 취재하는 것만도 버거운 기자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어릴 적 한 선생님이 해주셨던 말씀이 떠오른다. “여유가 있는 사람이 멋있는 거야. 어려운 상황에서도 마음의 여유를 갖도록 노력하자.”

어려운 걸 알기에 그 와중에 낸 여유에 박수를 보내게 된다. 지난달 26일 저녁 ‘숙명여고 답안 유출 사건’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A가 그랬다. 숙명여고에 근무해 불려 나온 그녀는 포대기에 싼 갓난아기를 안은 채 증인석에 앉았다. 당황한 재판장이 “아이를 맡길 사람이 없는지” 물었지만, A는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제가 안고 해야 한다”고 말했다. 재판 내내 크게 옹알이를 하는 아기 때문에 검사도, 변호사도 여러 차례 당황했다. 하지만 A는 억지로 불려 나온 법정에서 아기를 달래며 답변을 하면서도 절제된 미소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녀가 잃지 않으려던 마음 속 여유가 기억에 남는 건, ‘사법 농단’ 관련 재판에 증인으로 채택된 뒤 출석하지 않은 일부 현직 판사들과 꽤 다르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법 농단 혐의를 받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재판의 증인이지만, 본인의 재판 업무 때문에 ‘여유가 없다’며 한 달 뒤에나 출석할 수 있다고 한 일부 판사들 말이다. 너도, 나도, 우리 모두도 여유를 갖고 살기는 여러모로 어려운 세상이다.

송우영 JTBC 사회2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