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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희생된 분들께 사죄" 군·경, 71년 만에 머리 숙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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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광화문 추념식 무대 앞 설치된 동백꽃 조형물과 헌화된 꽃들. 김정연 기자

제주 4.3 광화문 추념식 무대 앞 설치된 동백꽃 조형물과 헌화된 꽃들. 김정연 기자

3일 오전 10시 30분, 광화문 광장 가운데에 차려진 '제주 4.3 71주년 추념식' 무대 앞에는 빨간 동백꽃 조형물이 놓였다. 제주에서, 서울에서 모여든 유족들과 관계자들은 상기된 표정으로 서로 인사를 나눴다.

민갑룡, 경찰청장으론 처음 참석

부청하(76) 재경유족회장은 "지난해 70주년 행사 때도 참여했는데, 감개가 무량하다. 그동안 '폭도의 자식'이라고 연좌제로 고통받았는데, 광화문에서 두 번째로 행사하다니 유족으로선 꿈에도 생각 못 해본 일"이라며 감격스러워 했다.
4.3 피해자의 아들이라는 고모(65)씨는 "4.3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 일인데, 우리 아버지는 4.3때 산에서 내려온 사람들한테 쌀이랑 옷가지를 줬다가 감옥에 6개월 살다 왔는데 내가 성인이 돼서야 말해주더라"면서도 "돌아가신 분이 1만5000명인데 6개월 옥살이는 명함도 못 내민다"고 손을 내저었다. 그는 "4.3은 항상 마음속에 있다. 오늘은 경찰청장이 온다고 해서 보러 왔다"고 전했다.

190403 제주 4.3 광화문 추념식. 희생자들의 이름이 화면에 지나가고 있다. 김정연 기자

190403 제주 4.3 광화문 추념식. 희생자들의 이름이 화면에 지나가고 있다. 김정연 기자

190403 광화문 제주4.3 추념식에 도착한 화환들. 김정연 기자

190403 광화문 제주4.3 추념식에 도착한 화환들. 김정연 기자

현직 경찰청장 첫 참석, '4.3 희생자 영전에 머리 숙여 애도'

이날 행사에는 민갑룡 경찰청장이 현직 경찰청장 신분으로는 처음으로 추념식에 왔다. 오전 10시 51분쯤 도착한 민 청장은 방명록에 '4.3 당시 무고하게 희생된 모든 분의 영전에 머리 숙여 애도의 뜻을 표하며, 삼가 명복을 빕니다'라며, '경찰도 지난 역사를 더욱 깊이 성찰하면서 오로지 국민을 위한 민주·인권·민생 경찰이 되겠습니다'라고 적었다. 민 청장은 이후 광장 한 쪽에 마련된 '대통령 4.3 기록 전시' 부스에 걸린 사진들을 하나하나 살펴본 뒤, 행사장으로 이동해 앞줄에 앉은 제주 4.3 유족들과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광화문 제주4.3 추념식에 참석해 방명록을 쓰고 있는 민갑룡 경찰청장. 김정연 기자

광화문 제주4.3 추념식에 참석해 방명록을 쓰고 있는 민갑룡 경찰청장. 김정연 기자

민 청장에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나눈 유족 이지순(53)씨는 "경찰청장이 4.3 행사에 오는 일이 생길까, 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현실이 되고 나니 마음이 더 급해진다"며 "4.3에 대해서 입을 떼는 단계고, 이 이야기가 지속돼서 대한민국에 '역사'로 기록되는 게 지금으로서 가장 큰 소망"이라고 덧붙였다.

흰 국화·빨간 동백 꽃바구니... 객석 곳곳 눈물 

"무자년 추운 겨울 1948년 음력 12월 4일. 그때 나는 열두살, 열다섯만 됐다면 덜 무서울 텐데..." 행사는 추모시 낭독으로 시작됐다. 이날 추념식에는 박원순 서울시장, 이용선 청와대 시민사회수석도 참석했다. 이어진 헌화 순서에서 민 청장과 이 수석은 흰 국화 바구니를, 박원순 서울시장은 빨간 동백꽃 바구니를 제단에 올리고 잠시 묵념을 했다.

2019년 광화문 제주4.3 추념식 중 눈물을 닦는 4.3 유족들. 김정연 기자

2019년 광화문 제주4.3 추념식 중 눈물을 닦는 4.3 유족들. 김정연 기자

앞서 민 청장과 인사를 나눴던 이지순씨(재경 4.3 유족회)가 '아버지께 드리는 글'을 읽자 객석 곳곳에서 시민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할아버지가 4.3 사건 때 돌아가셨다는 이씨는 "아버지, 너무 늦게 아버지를 이해해서 많이 죄송합니다. 자식들 앞길 열어주려고 분탕하고 있었다는 걸요. 아버지, 기억하겠습니다. 제가 연좌제에 걸려 취직이 안될까 봐 염려하던 아버지를요. 이렇게 아픈 가족사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습니다."라며 4.3 사건 이후에 유족들이 겪었던 고통을 말하고, "아버지, 아버지 손녀들이 살아갈 세상을 지켜봐 주십시오"라며 끝을 맺었다. 한 유족은 "내가 8살 때 4.3이 나서, 아버지는 시신을 찾았고 둘째 큰아버지는 시신도 못 찾았다"며 연신 눈가를 훔쳤다.

박원순 서울시장, 이용선 시민사회수석도 참석... 국방부 차관도 방문 예정 

박원순 서울시장은 "이념이란 이름으로 자행된 국가의 폭력 앞에 수많은 뭇별처럼 스러져간 제주 인구 10분의 1이나 되는 3만여명을 기억한다"며 "학살은 깊은 흉터를 남겼고, 오직 살아남기 위해 부모, 형제, 자식의 이름조차 기억에서 지워야 했던 시대의 아픔을 우리는 대물림 해왔다. 제주만의 상처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라고 강조했다.

추념식 말미에는 4.3 희생자 가족들과 추모객들의 헌화가 이어졌다. 객석에서 눈물을 훔치던 유족들은 줄을 서서 기다린 뒤 제단에 흰 국화꽃 한 송이씩을 얹고 묵념을 한 뒤 돌아섰다. 추념식이 끝난 뒤 조계종에서 진행하는 불교 천도제가 이어지고, 오후에는 천주교식의 추모 미사도 열린다. 4.3 범국민위원회 측은 "오늘 오후 5시에 국방부 차관이 이곳을 찾을 것이라고 전해왔다"고 밝혔다.

민 청장 "무고하게 희생되신 분들께 분명히 사죄"

민갑룡 경찰청장은 추념식이 끝난 뒤 기자들과의 대화에서 "4.3 당시 경찰에 대해 재평가 및 정부, 국회에서 여러 법적 절차 진행되는 걸로 안다. 법적 과정을 통해서 진실이 밝혀지면 경찰도 적극 동참할 것"이라며 "('양민학살' 부분에 대해서) 진실이 밝혀지고 있기 때문에, 밝혀진 사실에 따라 경찰도 인정할 건 인정하겠다"고 밝혔다. "경찰의 공식 사과로 봐도 되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민 청장은 "무고하게 희생된 분들께는 분명히 사죄드린다"고 답한 뒤 광장을 떠났다.

김정연 기자 kim.jeong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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