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사회 NGO] 옛 동독 독재현장서 시민의식 키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5면

남북통일과 북한의 인권문제, 이라크 파병, 새만금 사업, 원전센터 건설…. 우리 사회의 당면 과제지만 사회적 합의 도출은 여전히 어렵다. 민주시민 의식과 토론문화 부재가 원인이란 분석이다.

이런 가운데 중앙일보와 주한독일 콘라트 아데나워 재단(KAS)이 공동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NGO 단체의 실무 간부들을 초청, 지난 15~26일 독일에서 민주시민 교육을 주제로 세미나와 토론회를 열었다.[편집자]

"민주 시민은 민주교육을 통해 양성된다."

한국의 15개 NGO 대표들과 독일 관계자들이 참여한 독일 작센-안할트주의 벤트그레벤 연수원. 연사로 나선 베른트 뤼드케마이어 정치교육원장이 시민교육과 NGO 역할에 대해 강연했다.

그는 "국가와 NGO는 주권자인 국민이 국가와 지역사회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 객관적 지식과 비판 의식을 갖고 권리와 의무를 행사하도록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통일 후 옛 동독지역 주민에 민주주의를 가르치기 위해 다섯 곳의 교육원을 세웠으며, 연간 1백50여회의 세미나.강연.토론회가 이뤄진다"고 소개했다.

◇독일의 시민교육=민주시민 교육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5년 시작됐다. 나치 독재의 재발을 방지하고 시민에게 참여를 통한 민주의식을 불어넣기 위해서다.

정치교육원은 연방정부나 유럽연합(EU)으로부터 지원도 받지만, 시민단체 등에 예산을 분배해 교육을 위탁한다.

이들은 교육 효과를 높이기 위해 참여자들이 전문가.정치가.시민의 의견을 듣는 기회를 주거나 설문조사.사례연구를 통해 스스로 현상을 진단하고 해결책을 찾도록 한다.

프리드리히-실러 대학의 카를 다이히만 교수는 "국회.법정.국무회의.시의회 등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가정해 교육 참여자들이 각자 역할을 맡아 토론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시민교육은 일방적인 강의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배우고 가르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노베르트 베크만-디르케스 벤트그레벤 연수원장도 "시민교육 과정에서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하고 찬반의사를 표현하도록 하는 등 원칙이 지켜져야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장에서 배운다=독일은 생생한 역사 현장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민주교육에 활용하고 있다. 작센-안할트주 모리츠플라츠 정치폭력 희생자 기념관은 과거 동독 비밀경찰인 슈타지의 형무소.취조실을 박물관으로 조성한 곳이다. 취조실에는 도청장치.납치와 고문 도구 등이 전시돼 있다.

'스탈린주의로 박해받았던 사람들의 모임'의 요하네스 링크 회장은 "인권단체.협회를 결성, 활동하는 것은 과거를 되돌아봐야 확실한 민주주의를 지키고 물려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링크 회장 자신도 61~65년 동독의 형무소에서 강제노역을 했다.

안내를 맡은 안네그레트 슈테판은 "독재는 암과 같다. 야금야금 사회를 먹어 들어온다"며 지속적인 시민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분단 시절 동.서독 경계선 검문소가 위치했던 마리엔본. 서독 지역에서 서베를린으로 가려면 이곳을 거쳐야 했다. 1천명의 비밀경찰이 삼엄한 경계를 폈던 곳이다. 독일 정부는 96년 이 곳 7.5㏊를 독일 분단기념관으로 조성해 시민에게 개방했다.

요아힘 셰리블레 박사는 "마리엔본은 동독의 인간성 말살 사례를 보여주는 생생한 현장"이라며 "현재는 대학생과 일반 시민의 토론.세미나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의 시민교육 현황=80년대까지만 해도 정권의 홍보 도구란 인식 속에 청소년.학생에게 국한한 것으로 외면당했다. 90년대 이후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정치뿐만 아니라 여성.노동.환경 등 다양한 내용으로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지속성이 부족하고 재정지원 체계가 미흡하다는 평가다. 교재 개발이나 교육기관 간 네트워크 구성도 부진하다는 지적이다.

독일연수 팀장을 맡은 성공회대 차명제 교수는 "우리도 민주시민교육 체제의 내실화와 확대가 필요하다는 데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국내에는 대학교수들이 주축이 된 '민주시민 교육협의회'와 시민단체가 주축이 된 '민주시민 교육포럼'이 시민교육을 이끌고 있다.

이들은 독일식 시민교육 체제의 도입을 추진 중이며, 한국민주시민교육원 설립과 국가.지자체의 지원 역할 등을 담은 '민주시민교육지원에 관한 법률안'의 입법을 관철할 계획이다. 이번 독일 NGO 연수도 이 같은 교육체제 확립과 단체간 네트워크의 바탕이 될 전망이다.

베를린=강찬수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