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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년의 썸타는 경제] 회계판 '미투'의 시작…아시아나, 무릎 꿇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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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350 [사진 아시아나항공]

A350 [사진 아시아나항공]

아시아나항공의 '회계 쇼크'가 시작된 건 지난 22일이었다. 이 회사는 이날 '영업이익 459억원 흑자'로 적힌 감사보고서를 공시했다. 그러나 삼일회계법인이 제시한 감사의견은 '한정'이었다. 아시아나항공이 부채나 수익 규모를 가늠하는 데 필요한 증거 일부를 회계법인에 제시하지 않아 영업 실적을 믿을 수 없다는 의미였다. 회사 주식 거래는 금지됐다.

신용평가사들도 회사채 신용등급을 내릴 수 있다는 뜻(하향 검토)을 밝혔다. 아시아나항공의 신용등급은 'BBB-'로 한 단계만 더 떨어지면 사실상 자금조달이 힘든 투기등급(BB+ 이하)이 된다. 쇼크는 나흘 만에 진정됐다. 아시아나항공이 26일 증거를 제시 못 한 수익 규모를 손실로 처리하기로 했다. 삼일회계법인은 영업실적을 '350억원 적자'로 고친 이 회계장부에 대해 '적정' 의견을 냈다. 회계법인의 깐깐한 '숙제 검사'에 흑자로 둔갑할 뻔했던 실적이 바로 잡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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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결산에서만 부정적 의견 28개…지난 회계연도 넘어서  

'아시아나항공 회계 쇼크'를 두고 회계 전문가들 사이에선 회계법인판 '미투(MeToo)'란 평가가 나온다. 말할 수 없던 진실을 여성들이 공론화하기 시작한 것처럼 회계법인들도 쉽사리 밝히지 못한 부정적 감사의견(한정·부적정·의견거절)을 제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29일 오전 현재 총 31개 상장사가 적정 의견이 아닌 부정적인 감사의견을 받았다. 12월 결산 법인만 집계해도 지난 2017 회계연도에 기록한 27곳을 이미 넘겼다. 부정적 감사의견은 2015 회계연도에 11개 기업이 받았다가 꾸준히 늘고 있다.

그동안 회계법인들이 기업의 회계 오류를 알면서도 감사의견으로 제시 못 한 경우가 잦았던 이유는 미래 감사 일감을 따내지 못할 것이란 우려 때문이었다. 일감을 주는 기업에 비해 '을(乙)'의 위치에 있다 보니, 회사가 작성해야 할 재무제표를 회계사가 대신 작성해 주는가 하면, 손익 입증에 필요한 필수 자료도 얻지 못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이총희 청년공인회계사회 대표는 "젊은 회계사가 감사 자료를 회사에 요청했다가 받지 못해 담당 파트너 회계사에 고충을 토로하면, 도리어 핀잔을 듣는 일도 많았다"고 말했다.

이런 현상은 계열사가 많아 감사 일감을 많이 줄 수 있는 대기업일수록 심각했다. 총자산 2조원 이상인 상장사들은 2017 회계연도 결산 당시 단 한 곳도 부정적 감사의견을 받지 않았다.

감사의견으로 실적 수정, 비상 경영 이끌어낸 아시아나 사례

최근 아시아나항공 회계 쇼크가 '미투' 운동에 비유되는 이유는 회계법인이 대기업을 상대로 감사의견을 통해 회계장부 수정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다. 회계법인의 경고음은 비상 경영 대책으로 이어졌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27일 산업은행에 협조를 요청하고 박삼구 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기업의 회계장부를 믿고 투자가 일어나는 자본시장에서 회계장부가 믿을 수 있는지를 검증하는 회계 감사 본연의 역할이 발휘된 사례로 볼 수 있다.

김정흠 금감원 회계기획감리실장은 "감사의견은 기업의 숨기고 싶은 부실을 가리키는 화살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중요한 자본시장 인프라라고 할 수 있다"며 "정확한 의견은 기업의 경영 판단에도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어 기업·투자자 모두에게 이로운 것"이라고 강조했다.

검찰은 2016년 6월 분식회계 단서를 포착하고 서울 중구 대우조선해양 본사와 경남 거제시 옥포조선소 등에 수사관 150여명을 파견해 압수수색을 벌였다. [중앙일보 DB]

검찰은 2016년 6월 분식회계 단서를 포착하고 서울 중구 대우조선해양 본사와 경남 거제시 옥포조선소 등에 수사관 150여명을 파견해 압수수색을 벌였다. [중앙일보 DB]

바뀐 분위기, 대우조선 분식 사태 트라우마·외감법 개정 주효 

전문가들은 회계법인의 감사 행태가 달라진 배경에는 크게 대우조선해양 분식회계 사태의 트라우마가 작용했다고 보고 있다. 대법원은 지난해 3월 대우조선 분식회계를 눈감아 준 회계사들에게 징역형을 선고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회계법인 파트너 회계사는 "부실 감사로 회계사가 실형을 살 수 있는 마당에 '봐주기 감사'는 말도 꺼내기 어렵다"고 말했다.

또 지난해 회계법인 독립성 강화를 지원한 법령(주식회사 등의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 개정이 주효했다는 평가다. 이 법에 따라 모든 상장사는 9년 중 3년은 정부 지정 회계법인으로부터 감사를 받아야 한다. 회계사들이 감사에 집중할 수 있는 '표준 감사시간'도 한국공인회계사회가 정할 수 있도록 했다. 부정적 감사의견을 냈다가 감사 계약이 끊기지 않도록 계약 시점을 의견 제시 전으로 바꾸는 제도도 마련됐다. 감사의견을 제시한 뒤에 해당 회사와 감사 계약을 맺게 되면, 일감 수주를 위해 회계법인이 기업의 분식회계(재무제표를 거짓으로 꾸밈)를 눈감아 줄 여지가 커지기 때문이다. 이들 법규 개정은 최중경 회계사회 회장이 2016년 취임 이후부터 밀어붙였던 제도들이다.

이한상 고려대 경영대학 교수는 "올해 감사의견을 보면 기업과 회계법인 간 '갑을' 문제가 상당 부분 개선된 것으로 보인다"며 "특히 주기적인 정부 지정 감사에서 부실 감사가 드러나지 않도록 자율 수임 감사인들까지 깐깐하게 감사를 하는 환경이 마련됐다"고 설명했다.

김도년의 썸타는 경제

액수ㆍ합계를 뜻하는 썸(SUM)에서 따온 ‘썸타는 경제’는 회계ㆍ통계 분석을 통해 한국 경제를 파헤칩니다.

세종=김도년 기자 kim.don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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