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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해외에서 국내 기업 저격한 공정위원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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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기환 기자 중앙일보 기자
김기환 경제정책팀 기자

김기환 경제정책팀 기자

하루 새 생각이 바뀐 건 아니겠지만, 말은 확 바뀌었다.

“한국 재벌은 관료와 정치인을 포획하고 언론마저 장악했다. 사회적 병리 현상으로 확대되고 있다.”(11일 강연 자료)

“재벌은 한국의 소중한 경제 자산이다. 과거와 현재뿐 아니라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나는 재벌을 좋아한다.”(12일 실제 강연)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세르비아에서 열린 공정경쟁 관련 국제회의에서 발표한 내용이다. 11일 연설문 내용을 미리 공개했다가 논란이 일자 12일 실제 강연에선 바꿔 말했다. 4대 그룹의 한 임원은 “아무리 재벌을 때려잡고 싶더라도 안에서 해야 하는 것 아니냐. 해외에서 국내 재벌을 비판하는 건 누워서 침 뱉기”라고 지적했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가벼운 언행도 그렇지만 묻혀버린 강연문 곳곳에 녹아든 공정위원장의 ‘재벌관’이 문제다. 그는 “재벌 3세는 창업자와 달리 위험에 도전해 수익을 창출하기보다 사익추구 행위를 통한 기득권 유지에만 몰두한다”거나 “재벌의 성장이 중소기업 성장마저 방해한다”고 지적했다. 일방적이고, 편향된 주장이다.

반재벌 정서는 팩트 왜곡으로도 이어졌다. 그는 “10대 재벌 자산총액이 국내총생산(GDP)의 80%에 달한다”고 지적했는데 자산 총액은 GDP와 단순 비교할 수 없다. 자산은 기업이 생산한 부가가치뿐 아니라 보유한 현금·건물·토지를 모두 포함하는 데 비해 GDP는 1년 동안 국내 경제활동을 통해 일으킨 부가가치의 총합이라서다. “10대 재벌의 직접 고용 인원은 전체의 3.5%에 불과하다”고도 했는데, 직접 고용보다 훨씬 큰 협력사·간접 고용 등 파급 효과는 무시했다.

김 위원장의 설화(舌禍)에는 전력이 있다. 그는 취임 직후 “재벌을 혼내주고 오느라 (확대경제 장관회의) 참석이 늦었다”고 하거나 “이해진 전 네이버 의장은 애플의 스티브 잡스와 같은 미래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고 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미국·중국은 자국 기업을 살리기 위해 공직자들이 국가 이미지 추락도 무릅쓰고 ‘무역 전쟁’을 불사한다. 총성 없는 글로벌 전쟁터에서 경쟁하는 기업의 애로를 잘 알기 때문이다. 백번 양보해 공정위원장의 ‘생각’이 그렇다 치더라도 해외에서 뛰는 기업을 도와주지 못할망정 국제회의에서 공개적인 ‘기업 때리기’에 나선 건 공직자로서 ‘TPO’(Time·Place·Occasion, 시간·장소·상황)가 모두 부적절한 처신이었다. 그는 분명 공정위원장인데 ‘재벌 저격수’로 불렸던 시민단체 활동가 시절의 과거가 겹쳤다.

김기환 경제정책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