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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선규도 ‘대학로 프린스’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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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지영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지영 문화팀 기자

이지영 문화팀 기자

배우 진선규가 유명해졌다. 영화 ‘극한직업’으로 천만 배우 반열에 오르면서 전국구 연예인이 된 모양새다. 그가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 건 2017년 청룡영화제 남우조연상을 받으면서였다. 영화 ‘범죄도시’에서 조선족 역을 실감나게 연기했던 그는 시상식 무대에 올라 “나는 조선족이 아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다”라고 했다. 데뷔 14년 차에 새삼 국적을 밝혀야 했을 만큼 그는 오랜 세월 ‘무명’ 배우였다. ‘극한직업’이 연일 흥행 기록을 갈아치우자 진선규도 뉴스의 인물로 떠올랐다. 그를 두고 “긴 무명 생활 청산”이라고 평한 기사가 줄을 잇고, “충무로 신데렐라”니 “인생역전”이니 하며 벼락 스타 취급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공연계의 반응은 다르다. 될 사람 됐다 식의 담담한 분위기다. 대학로에서 진선규는 이미 유명 배우였다. 소극장 공연의 주인공을 도맡아 하며 ‘대학로 프린스’로 활약한 세월이 10여 년이다. 진선규와 한국예술종합학교 동문인 연출가 장유정의 증언에 따르면, 그의 연기력은 학생 때부터 유명했다. 그가 교내 연극 ‘햄릿’의 주인공을 맡았을 땐 그의 얼굴 사진으로 공연 포스터를 만들었다. 스타 캐스팅이 없는 교내 공연에서 배우 사진으로 포스터를 제작하는 건 전례없는 일이었다. 학교에서 그는 이미 ‘믿고 보는 배우’였던 것이다. 졸업 후 진선규는 네 발로 뛰는 야생소년(‘거울공주 평강이야기’), 사랑에 들뜬 고등학생(‘뜨거운 여름’), 냉혈한 북한 군인(‘여신님이 보고계셔’) 등으로 연극·뮤지컬 무대를 오가며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오 당신이 잠든 사이’ ‘김종욱 찾기’ 등 자신의 대표작에 그를 캐스팅했던 장유정 연출가는 “진선규는 몸 근육, 얼굴 근육의 섬세한 떨림까지 이용해 감정 연기를 하는 배우”라고 말했다.

대학로로 대표되는 소극장 무대는 스타의 산실이다. 유해진·송강호·김윤석 등 숱한 스타들이 무대에서 성장했고, 수많은 ‘포스트 진선규’들이 오늘밤에도 공연을 한다. 편집 없는 실시간 무대에서 관객과 호흡하며 쌓은 내공이 카메라에 적응하는 순간, 이들의 연기는 스크린과 모니터를 통해 무제한 복제되며 대중 문화로 확산된다. 대중 스타가 된 이들이 다시 무대로 돌아와 공연 시장을 키우는데 기여하기도 한다. 극단 학전의 ‘지하철 1호선’으로 연기를 시작한 영화배우 황정민은 지난해(‘리처드 3세’)와 올해(‘오이디푸스’) 연거푸 연극에 출연해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800석을 두 달 동안 꽉 채웠다.

‘극한직업’ 이 관객수 1600만 명을 돌파한 지난 3일, 공연계에 바라는 것을 진선규에게 물었다. “소극장 창작 공연에 지원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콘텐트 산업의 선순환 생태계 구축을 위한 첫걸음. 답은 어쩌면 뻔했고, 효과를 보증할 사례는 무수히 많았다.

이지영 문화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