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여의도인싸]"北비판 차단 목적?" '디지털 독재' 의심받는韓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여의도 인싸’는 국회 안(inside)에서 발생한 각종 이슈와 쏟아지는 법안들을 중앙일보 정치팀 2030 기자들의 시각으로 정리합니다. ‘여의도 인싸’와 함께 ‘정치 아싸’에서 탈출하세요.

“한국은 디지털 독재 체제로 향하나?”
미국의 경제 전문지 포브스가 지난달 25일 낸 기사의 제목입니다. 지난달 11일 정부가 “해외 불법 성인ㆍ도박 사이트 접속을 차단하겠다”며 https 차단 정책을 편 데 대한 비판입니다.

포브스는 ‘검열’이 나타난 배경으로 북한을 주목했습니다. 합의가 무산된 2차 북미정상회담(2월 28일) 3일 전에 쓰여진 이 글에서 포브스는 “전문가들과 심지어 트럼프 미 대통령 측근마저 2차 북미정상회담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데, 문재인 대통령은 희망을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지난해 북한 전문매체 ‘38 노스’를 운영하다 한국 정부의 예산 지원 중단으로 문 닫은 미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SAIS) 산하 한미연구소(USKI), 지난해 국정원에서 돌연 사퇴해 여러 추측을 낳은 태영호 전 영국주재 북한공사 사례를 거론합니다. 태 전 공사는 “북한은 비핵화 의사가 없다”, “영변 외에도 핵 시설이 더 있다” 등 비판 발언을 이어왔죠.

지난달 25일자 포브스 기사. '한국은 디지털 독재 체제로 향하나'라는 제목이 달렸다. [포브스 홈페이지 캡처]

지난달 25일자 포브스 기사. '한국은 디지털 독재 체제로 향하나'라는 제목이 달렸다. [포브스 홈페이지 캡처]

이번 조치에 대해 포브스는 이렇게 추론합니다. “한국 정부가 하는 일은 당신이 무엇을 하려는지 살펴보려는 것이다. 북한 비판에 대한 자유를 침식하려는 ‘큰 틀’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청와대 청원 사이트에서 ‘https 차단 반대’가 일주일 만에 20만명을 넘길 정도로 거센 반발에 부닥친 정부는, 이역만리 떨어진 해외 언론에도 무차별 폭격을 당하고 있습니다.

◇슬그머니 열리는 야동 사이트

그런데 이런 와중 수상한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이효성 방통위원장이 “국민과의 소통이 부족했다”(지난달 21일)며 사과한 지 얼마 안 돼 차단됐던 불법 사이트들이 하나둘씩 열리기 시작한 거죠. 인터넷 커뮤니티에선 다시 열린 사이트들의 주소를 공유하는 풍경도 벌어졌습니다. “비판이 거세지자 정부가 눈치를 보면서 발을 뺀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왔죠.

지난달 11일 접속이 차단됐다가 다시 해제된 해외 성인 사이트 화면. [홈페이지 캡처]

지난달 11일 접속이 차단됐다가 다시 해제된 해외 성인 사이트 화면. [홈페이지 캡처]

방통위에 직접 물어봤습니다. 차단됐던 사이트가 일부 해제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오류일 뿐 정책의 변화는 없다”는 입장이 나왔습니다. 구체적으론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정책 시행 이후 ISP 업체(KTㆍSKT 등)에 차단 사이트 목록 895건을 새로 보냈는데, 이 업체들이 새 차단 방식으로 전환하다 실수로 이전에 보낸 목록까지 차단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차단됐으면 안 될 사이트가 실수로 차단됐고, 이번 해제는 실수를 바로잡은 거라는 설명입니다.

여기서 모순이 생깁니다. “이전에 보낸 목록까지 실수로 차단돼 바로잡았다”는 부분입니다. 기존의 URL 차단방식이든 새로 적용한 https 차단 방식이든, 방심위는 불법ㆍ유해 사이트 목록을 ISP 업체에 보내는 게 고유 업무입니다. 즉 이전에 보낸 사이트 목록도 전부 유해하다는 심의는 받았던 것이란 얘기죠. 그런데 다시 해제됐다? 앞뒤가 안 맞는 말입니다.

그래서 방심위에도 물어봤습니다. 관계자는 “우리는 심의해서 통보하는 업무만 하지, 왜 해제가 된 건지는 잘 모른다. 확실한 건 저희가 차단을 해제해달라고 요청한 적이 없다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빅 브러더 정책’이라 불릴 정도로 국민 반발이 심한 정책을 수행하면서 어느 기관도 명쾌한 대답은 내놓지 못했습니다.

지난달 11일 청와대 청원 사이트에 등록된 'https 차단 반대' 청원. 등록 1주일만에 답변 조건인 서명인 20만명을 넘겼다. [청와대 청원 사이트 캡처]

지난달 11일 청와대 청원 사이트에 등록된 'https 차단 반대' 청원. 등록 1주일만에 답변 조건인 서명인 20만명을 넘겼다. [청와대 청원 사이트 캡처]

◇불법 사이트 차단은 명분일 뿐?

성인 사이트 ‘차단→해제’ 혼선이 나타나면서, “불법 성인ㆍ도박 사이트를 막겠다는 건, 애초부터 관심 없었던 것 아닌가”라는 의심이 제기되는 겁니다.

임종인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방통위ㆍ방심위의 설명은 도무지 앞뒤가 안 맞는다. 실효성도 없는 정책으로 통제하려다 반발 심해지고, 20대 지지율 떨어지니깐 다시 푼 것 아니겠나”라고 말했습니다. 이어서 “더 깊게 보자면, 중국이나 일부 아랍 국가들도 처음 명분은 불법 성인물 차단으로 시작해, 인터넷 통제를 강화했다. 결국 불법 성인ㆍ도박 사이트 차단은 시작 명분일 뿐, 실제 목적은 통제ㆍ검열에 있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국회에선 이효성 방통위원장을 불러내 엄중히 따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습니다.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속 박대출 자유한국당 의원은 “이런 엄청난 일을 벌이면서, 우왕좌왕 혼선을 빚는 게 말이 되나. 애초부터 불법 성인 사이트 차단엔 관심 없고 다른 ‘큰 그림’이 있던 것 아닌가. 과방위 회의에 이효성 방통위원장을 불러내 따져봐야 할 엄중한 사안”이라고 말했습니다. 박 의원이 말한 ‘큰 그림’에 포브스가 지적한 ‘큰 틀’이 오버랩되는 게 기분 탓이기를, 그런 지적이 제발 기우이기를 바라봅니다.

김준영 기자 kim.junyoung@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