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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실리콘밸리, 판교] 미국서 배워온 스크럼, 판교선 직원 쪼는 시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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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기쁨과 슬픔』이 묘사한 스타트업 부조리극

지난 20일 오후 6시 판교역 1번출구. 이곳은 판교테크노밸리에서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직장인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출구다. 오후 6시가 넘어가면 퇴근하려는 사람들의 행렬로 긴 줄이 생긴다. 박민제 기자

지난 20일 오후 6시 판교역 1번출구. 이곳은 판교테크노밸리에서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직장인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출구다. 오후 6시가 넘어가면 퇴근하려는 사람들의 행렬로 긴 줄이 생긴다. 박민제 기자

지난해 창비 신인상을 받은 단편소설『일의 기쁨과 슬픔』은 요즘 판교테크노밸리 스타트업 종사자들 사이에서 필독서로 꼽힌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발원한 첨단 기업문화가 한국 판교에 이식되면서 변질된 풍속도를 정밀하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는 "스타트업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하이퍼리얼리즘(극사실주의) 소설"이라는 평가까지 나온다. 지난해 10월 창작과비평 홈페이지에 공개된 소설 누적 조회 건수는 22만1810건(지난달 21일 기준)에 이른다. 무료로 공개됐다는 점을 감안해도 다른 소설들의 평균 조회 건수(1000~2000건)를 압도한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소설 분량은 A4용지 12장. ‘우동마켓’이라는 가상의 중고거래 앱을 서비스하는 판교 소재 스타트업이 배경이다. 이 짧은 소설 속 어떤 부분이 7만여명 판교인들의 심금을 울린 걸까.
중앙일보는 저자 장류진(33) 작가, 그리고 스타트업 재직 경험이 있는 10명을 인터뷰 해 다른듯 닮은 소설 속 판교와 현실 속 판교를 비교해봤다.

"월급은 기쁘지만 일은 슬픈 직장인 심정 묘사" 

소설을 쓴 장류진(33) 작가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판교 소재 IT회사에서 기획자로 수년간 일한 경험과 주변에서 보고 들은 얘기를 소설에 녹여 냈다고 말했다. 지금도 판교 인근 소재 IT기업에서 기획자로 일하고 있다. 그는 “부조리함을 고발하려는 의도는 절대 아니다”라며 “지금 다니는 회사 입사 전 재취업을 알아보는 과정에서 내가 일해온 공간 그리고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이 많이 나 이를 소설로 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을 하면 월급을 받는다던지 파생되는 인간관계가 생긴다던지, 내가 뭔가 기여하고 있다는 자존감을 얻는다던지 등 기쁨이 있어요. 하지만 그것을 빼고는 슬픈 것들이 너무 많잖아요. 직장인 대부분 다 회사가기 싫어하지 않나요. 월요병도 그래서 생긴 것이고요. 가급적 적게 일하고 많이 벌고 싶잖아요. 저는 일에 대한 그런 두가지 감정을 판교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소설 속에서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단편소설『일의 기쁨과 슬픔』으로 지난해 창비 신인상을 수상한 장류진 작가. [사진 창작과 비평]

단편소설『일의 기쁨과 슬픔』으로 지난해 창비 신인상을 수상한 장류진 작가. [사진 창작과 비평]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판교서 ‘탱자’가 돼버린 실리콘밸리 ‘귤’

“…(전략)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한 스크럼이라면 이 모든 과정이 길어도 십오분 이내로 끝나야 했다. 하지만 우리 대표는 스크럼을 아침조회처럼 생각하고 있으니 심히 문제였다. 직원들이 십분 이내로 스크럼을 마쳐도 마지막에 대표가 이십분 이상 떠들어대는 바람에 매일 삼십분이 넘는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일의 기쁨과 슬픔』1페이지)

스크럼은 미국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유행한 프로젝트 관리기법 중 하나다. 매일 약속된 시간에 선 채로 짧게 각자 맡고 있는 분야를 이야기하고 진행 상황을 점검하는 것을 말한다. 효율적 관리 기법이지만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귤화위지ㆍ橘化爲枳)’는 사자성어처럼 한국에선 '용도변경'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5년차 개발자인 한모(26)씨는 스크럼으로 고생한 경험담을 털어놨다.

“너도나도 스크럼을 도입하던 시기 스타트업을 다녔어요. 큰 프로젝트를 잘게 나누고 작은 단위를 차근차근 해결해 나가자는 취지였죠. 그런데 문제는 경영진이 작은 프로젝트가 완성될 때마다 보고서를 내라고 하더라구요. 기민한 개발 프로세스라는 목표는 희미해지고 경영진이 실무자를 관리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습니다.”

현재 스타트업에 근무 중인 이모(31)씨도 토론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적 토양에선 미국식 방법론이 크게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자유로운 토론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적 문화에서 한계가 있어요. 대표가 이를 진행하다 보면 직원을 소위 ‘쪼는’ 시간으로 변질되기 십상이죠. 처음할 땐 뭔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얘기하라고 했지만 결국 매일 아침 대표가 일을 만들어주고, 직원들은 듣는 회의가 되버리더군요.”

상급자 영어 이름 뒤엔 극존칭

“회사가 위치한 곳이 씰리콘밸리가 아니고 판교 테크노밸리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영어 이름을 쓰는 이유는 대표가 그렇게 정했기 때문이다. 대표부터 직원까지 모두 영어 이름만 쓰면서 동등하게 소통하는 수평한 업무환경을 만들자는 취지라고 했다. 하지만 다들 대표나 이사와 이야기할 때는 ‘저번에 데이빗께서 요청하신…’ 이러고 앉아 있었다.” (『일의 기쁨과 슬픔』2페이지)

영어 이름을 쓰는 문화에 대한 묘사도 스타트업 재직자들에게 공감을 산 부분이다. 스타트업 근무 경험이 있는 남모(30)씨 얘기다.

“많은 스타트업들이 수평적 문화가 필요하다며 영어 이름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이름만 영어로 부른다고 수평적이 되지는 않아요. 유교 문화권인 탓에 소설처럼 ‘리처드 대표님’ 이렇게 부르는 일이 현실에선 비일비재하니까요.. 영어 이름 뒤에 극존칭을 쓰면 아무 의미가 없어지죠.” 

 한국적 상하관계에 익숙한 이들은 혼란을 겪기도 한다. 스타트업 여러 곳의 홍보를 대행하고 있는 박모(29)씨는 "영어 이름이 피터면, 메신저로 대화할 때도 'peter nim'(피터 님)하는 식으로 한국 존칭을 붙이는 이들도 많다"고 말했다.

영어 이름 대신 철저하게 경어를 쓰는 조직 문화를 만드는게 효율적이라는 조언도 있다. 대기업에서 10년 넘게 근무하다 2017년부터 스타트업 영업담당으로 일하고 있는 손모(37) 씨의 설명이다.

“처음 스타트업 업계로 왔을 때 가장 어색했던 것 중 하나가 영어 이름을 쓰는 문화였어요. 기본적으로 나이ㆍ경력으로 서열을 나누는 한국 문화에 익숙해져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죠. 고민 끝에 합의점을 찾은 것이 영어 이름 대신 철저하게 서로 존댓말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10살 넘게 차이나도 서로 경어로 소통하다보면 수평적 관계에 근접할 수 있더라구요. 반말은 폭언, 욕설로 이어지기 쉬우니까요.”

‘개발자 천국’ 스타트업, 현실에선?

“대표가 케빈에게 내민 카드는 ‘개발적으로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주겠다’였다고. 겨우 그런 말로 설득을 한 것도 신기했지만 고작 그런 말로 설득이 된다는 것도 놀라웠다. 그래서 케빈은 지금 ‘개발적으로’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있나 모르겠다. 매일 나오는 버그 잡기 바쁜 거 같은데.”(『일의 기쁨과 슬픔』8페이지)

소설 속 등장 인물 중 케빈은 옆동네 포털사에서 대표가 모셔온 이른바 ‘천재 개발자’다. 하지만 인원이 부족할 수 밖에 없는 스타트업 사정상 둘이서 할 일을 혼자 떠맡아 하다보니 개발보단 유지 보수에 급급해 히스테리를 부리는 것으로 묘사된다. 2곳의 스타트업에 다녀본 이모(25)씨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전 직장이 직원 3명인 스타트업이었어요. 마케팅 분야를 생각하고 들어갔는데 업무 범위가 너무 넓었어요. 몰랐는데 회사가 소송을 당하고 있기도 했어요. 그러다보니 투자회의 통역하면서 대신 발표도 하고 소송을 위한 법률 자료도 제가 다 번역했습니다. 심지어 대표가 휴대전화 보험금 수령이나 골프채 빌리기 등 사적인 업무를 시키기도 했어요. 업무보다 자기 개인 일을 더 먼저 해달라할 때도 있었죠. 제 체력과 열정과 노동을 깎기만 하는 회사에 실망해 두 달 반만에 퇴사했습니다. 매일 10시부터 5시까지 점심시간 30분 제외하고 일했는데 두 달 동안 겨우 130만원 받았습니다. 앞으로도 직원 10명 이하인 회사, 일을 가르쳐 주는 사수가 없는 회사는 안 가려구요.”

창업자와 직원의 동상이몽(同床異夢)

“저희 대표나 이사는 매일매일 그런 생각을 하겠죠? 어떻게 돈 끌어오고, 어떻게 돈 벌고, 어떻게 3퍼센트의 성공한 스타트업이 될지 잠들기 직전까지 고민하느라 걱정이 많을거에요. 전 퇴근하고 나면 회사 생각을 안하게 되더라고요.”(『일의 기쁨과 슬픔』9페이지)

부모 집 창고를 빌려 마음 맞는 동료들끼리 창업해 몇달간 밤을 새우다시피 해서 만든 제품ㆍ서비스가 대박 나면서 주식 부자가 되는 얘기는 실리콘밸리의 전형적인 성공 스토리다. 하지만 스타트업 종사자가 창업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창업자에게 회사의 성공을 위해 헌신하는게 지상과제라면 직원에겐 ‘워라벨(일과 삶의 균형)’이 더 중요할 수 있다. 1년 6개월간 다니던 대기업에서 퇴사한 이후 2017년부터 스타트업에서 일하고 있는 최모(28)씨는 대표와 직원이 서로 꿈꾸는 스타트업에 대한 이미지가 충돌한다고 설명했다.

“대표 등 초기 멤버와 이후 들어온 직원들은 스타트업에 대한 생각이 다를 수 있어요. 초기 멤버들은 크게 성공해 돈을 벌려고 불안전성을 감수하고 자기 빚까지 져가며 창업을 하죠. 이들에게 스타트업은 40시간씩 잠도 자지 않고 열정을 불사르며 일하는 곳이에요. 하지만 직원들은 실리콘밸리에선 오후 5시에 퇴근한다는 등 워라벨을 기대하고 온 사람이 많죠. 양 쪽의 생각이 많이 다르다 보니 갈등이 있을 수 밖에 없어요. 스타트업 대표들 모인 강의에 나가보면 ‘직원들 똑똑해보여서 뽑아 놓으면 자꾸 나간다’는 말을 많이 하더라구요. 그게 다 양쪽이 스타트업에 대해 생각하는 바가 달라서 그런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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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환의 공간, ‘판교육교’

장류진 작가의 단편소설『일의 기쁨과 슬픔』에 등장하는 ‘판교육교’의 실제 모델인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삼평동 동안교 조형물. 판교역에서 봇들저류지 공원을 넘어 엔씨소프트 사옥 방면으로 가는 동안교에 한쪽에 설치돼 있다. 육교 모양이기는 하지만 도로를 가로질러 길 건너편으로 이어지지 않고 도로와 평행하게 놓여있다. 박민제 기자

장류진 작가의 단편소설『일의 기쁨과 슬픔』에 등장하는 ‘판교육교’의 실제 모델인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삼평동 동안교 조형물. 판교역에서 봇들저류지 공원을 넘어 엔씨소프트 사옥 방면으로 가는 동안교에 한쪽에 설치돼 있다. 육교 모양이기는 하지만 도로를 가로질러 길 건너편으로 이어지지 않고 도로와 평행하게 놓여있다. 박민제 기자

“그런데 계단을 다 올라가고 나서 어딘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육교가 길 건너편으로 이어진게 아니라 다시 우리가 있던 쪽으로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일의 기쁨과 슬픔』9페이지)

소설에서 두 주인공이 얘기를 나누는 곳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삼평동 동안교 한쪽에 설치돼 있는 이른바  ‘판교육교’를 모델로 했다. 판교역에서 봇들저류지 공원을 넘어 엔씨소프트 사옥 방면으로 가는 길에 있다. 육교로 불리기는 하지만 도로를 가로질러 길 건너편으로 이어지지 않고 도로와 평행하게 놓여있다. 판교 개발 초창기 주변 경치를 바라보거나 사진을 찍는 전망대 역할로 설치됐다. 판교 소재 기업 직장을 다닌 고모(36)씨 얘기다.

“육교이지만 육교같지 않은 이 조형물이 판교 직장인들 사이에선 유명한 애환의 공간이에요. 최첨단 건물이 즐비한데 그 속에는 또 최첨단이지 않은 고루한 모습이 발견되는 판교와 뭔가 이미지가 묘하게 닮아있는 느낌이죠. 육교 역할은 못하지만 전망대 역할을 그래도 하잖아요. 저도 답답할 때 한번씩 이곳에 올라가면 조금 마음이 괜찮아지더라구요.”  

 판교=박민제ㆍ편광현 기자 letm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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