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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실리콘밸리,판교] 실리콘밸리 뺨치는 판교 점심값…볶음우동 한 그릇 1만4000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점심가격 인상을 알리는 플랙카드. 판교밸리에서 가성비 좋은 곳으로 통하던 식당이었지만 올해 초부터 점심 가격을 인당 1000원 인상했다. 편광현 기자

점심가격 인상을 알리는 플랙카드. 판교밸리에서 가성비 좋은 곳으로 통하던 식당이었지만 올해 초부터 점심 가격을 인당 1000원 인상했다. 편광현 기자

'점심값' 각오해야 하는 판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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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교밸리 내 한 분식집.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해 인기가 높은 편이다. 점심 시간을 맞아 식당 내부가 손님들로 가득하다. 편광현 기자

판교밸리 내 한 분식집.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해 인기가 높은 편이다. 점심 시간을 맞아 식당 내부가 손님들로 가득하다. 편광현 기자

지난 18일 정오. 경기도 성남시 판교신도시 H스퀘어의 한 분식집. 점심시간을 맞아 가게 내부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붐볐다. 가게 밖에도 순서를 기다리는 대기 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다. 한 사람당 7000~8000원이면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어 인기인 식당이다. 반대로 메뉴가 대부분 1만원이 넘는 인근 식당은 사람들이 띄엄띄엄 앉아있어 대조를 이뤘다. 판교 소재 게임업체에서 3년째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전 모(27ㆍ여) 씨는 “판교에선 점심값으로 적어도 1인당 1만~1만3000원 정도는 생각해야 한다”며 “서울 잠실 집 근처에선 6000~7000원이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많은데, 여기선 그 돈으론 떡볶이 같은 분식밖에 못 먹는다”고 말했다.

미국 실리콘밸리 ‘뺨치는’ 판교 밸리 물가

‘판교의 생활물가가 미국 실리콘밸리 못잖다’는 자조 섞인 한탄이 나온다. 그래서 이 일대에서 근무하는 이들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판교 밸리에서 근무 중인 개발자와 직장인 등은 7만여 명을 헤아린다. 미국 실리콘밸리 역시 구글이나 애플 같은 하이테크 기업들이 몰려있다 보니 물가 난과 주거난이 심각한 상황이다. 지난해 실리콘밸리 리더십그룹 등이 펴낸 ‘실리콘밸리 경쟁력 보고서(SVCIP)’는 “(주거난과 물가 등으로 인해) 실리콘밸리식 삶의 질과 혁신 모델은 위기에 처해있다”고 경고했을 정도다. 실제 실리콘밸리 내 기업과 그 임직원들은 상대적으로 물가가 저렴한 로스앤젤레스 등 인근 지역으로 이주하는 추세가 뚜렷해지고 있다.

실리콘밸리 내 치솟은 집값 등으로 인해 거주할 공간을 찾지 못한 이들이 도로변에 캠핑카를 대고 임시거처로 쓰고 있다. [AP]

실리콘밸리 내 치솟은 집값 등으로 인해 거주할 공간을 찾지 못한 이들이 도로변에 캠핑카를 대고 임시거처로 쓰고 있다. [AP]

비싼 임대료 탓, 대기업 커피 브랜드도 못 버텨

식비를 비롯해 판교 밸리의 물가 수준이 높은 건 비싼 임대료 때문이다. 실제 이 지역 임대료는 대기업 계열 커피 브랜드도 견디지 못할 정도다. 지난 2017년 3년간 판교에서 운영하던 매장을 철수한 대기업 커피 브랜드 관계자는 “이 일대 물가가 워낙 세다 보니 임대료는 서울 도심 급이지만, 평일 낮에만 반짝 매출이 나오는 구조여서 매장을 운영할수록 적자였다”고 말했다.
사정은 일반 상점도 마찬가지다. 이 지역 일식집 종업원인 김모 (50ㆍ여) 씨는 “이 동넨 임대료가 엄청나게 높다. 우리 가게가 한 달에 600만원이 나간다”며 “임대료 부담 때문인지 이쪽 상가에 식당이 들어오면 10개 중 5개가 1년이 채 안 돼서 나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엄청나게 비싼 임대료를 고려하면 음식값을 비싸다고 하기도 어렵다”고 덧붙였다. 높은 임대료가 음식값을 높이고, 이로 인해 이 일대 직장인들은 회사 외부에서의 소비를 꺼려 상인들은 손님이 줄어드는 ‘악순환 고리’가 생겨나고 있는 셈이다.
그나마 자체 구내식당을 갖춘 엔씨소프트나 넥슨 등은 사정이 나은 편이다. 매 끼니 외부에서 밥을 사 먹어야 하는 기업의 직원들은 식사비 부담이 더 크다. 이 때문에 일부는 아예 체념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판교 밸리에서 개발자로 일하고 있는 한상훈(27) 씨는 “판교에선 매 끼니 1만원 이상이 드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일본식 볶음 우동(야키소바)을 먹고 1만4000원을 낸 적도 있다”며 “비싼 음식값에 놀란 적도 많았지만 별다른 선택지가 없으니 ‘그냥 돈 좀 더 내더라도 맛있게 먹자’고 받아들이는 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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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교 밸리 기업들, 직원에 밥값 지원 강화  

사정이 이러니 판교 밸리 기업들 역시 소속 직원의 ‘밥값 지원’을 강화하는 추세다. 아무래도 식대 등에 민감한 젊은 직원이 많기 때문이다. 카카오모빌리티는 올 초부터 점심 식대 지원금을 기존의 두 배인 월 20만원으로 늘렸다. 저녁에는 김밥과 라면 등 간단한 먹거리를 제공한다. 야근 등으로 부득이하게 회사 외부에서 저녁을 먹어야 하는 이들에게는 회사가 밥값을 내준다. 카카오페이지는 ‘식권 대장’이라는 앱을 통해 직원 한 사람당 최소 월 15만원을 지원한다. 야근하는 이에게는 특별식대를 추가로 준다. 전 달 다 사용하지 못한 식대는 자동으로 이월된다.

카카오게임즈는 빈속으로 출근한 직원들을 위해 김밥과 과일 등 간단한 식사류를 무료로 제공한다. 아침거리를 살펴보는 카카오게임즈 직원들. 사진 카카오게임즈

카카오게임즈는 빈속으로 출근한 직원들을 위해 김밥과 과일 등 간단한 식사류를 무료로 제공한다. 아침거리를 살펴보는 카카오게임즈 직원들. 사진 카카오게임즈

NS홈쇼핑은 직원 한 사람당 매월 19만8000원씩의 밥값을 사원증 카드에 적립해준다. 구내식당(끼니당 4500원)은 물론 식당가 엔바이콘에 있는 12곳의 식당에서 사용할 수 있다. 엔바이콘은 NS홈쇼핑의 외식업 관련 자회사다. 카카오게임즈는 아침 식사를 챙기지 못하고 출근한 직원을 위해 매일 아침 사내 카페테리아에서 김밥과 샌드위치ㆍ토스트ㆍ시리얼과 과일 등을 무료로 제공한다. 삼성중공업, 다산네트웍스, 네이버 등도 중식비로 월 10만~12만원가량을 별도 지원한다.

NHN엔터는 제휴식당만 50곳 넘어

임직원들을 위해 회사 외부에 제휴식당을 두는 곳도 있다. 게임업체인 웹젠은 회사 인근 식당 4곳을 제휴식당으로 정하고, 직원들에게 하루 7000원의 할인 혜택을 준다. 제휴식당은 일식과 중식, 한식, 베트남 음식 등으로 최대한 다양하게 했다. NHN엔터테인먼트 역시 자사 결제 서비스인 ‘페이코’ 앱을 활용해 점심 식권을 제공하고 있다. 회사 인근 53곳의 식당에서 쓸 수 있는 이 식권은 하루 한 번, 회당 최대 6500원까지 사용할 수 있다. 초과금액은 본인이 별도로 부담한다. 8000원짜리 메뉴를 시켰다면 6500원은 점심 식권으로 내고, 나머지 1500원은 본인이 내는 식이다. 정광호 서울대 교수(개방형 혁신학회 부회장)는 “50만명이 넘는 하이테크 기업 종사자를 거느리고 있는 미국 실리콘밸리 내부에서도 높은 물가가 혁신 역량을 위협하고 있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온다”며 “‘실리콘밸리에서처럼 연 2억원 넘게 벌어도 높은 주거비와 물가 탓에 나는 가난하다’고 말하는 개발자가 늘어나지 않도록 근본적인 해결방안 마련을 고민해 볼 시점”이라고 말했다.

판교=이수기ㆍ편광현 기자 retali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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