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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넛 같은 한·일관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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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윤설영 기자 중앙일보 도쿄 특파원
윤설영 도쿄 특파원

윤설영 도쿄 특파원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임기가 3년 7개월 겹쳤다. 임기 초반 허니문 같은 시기도 있었지만 야스쿠니 신사 참배 강행, 역사교과서 갈등 등으로 두 정상은 거의 원수처럼 되고 말았다. 고이즈미 총리는 임기 막판이던 2006년 8월 15일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걸 포함해 임기 중 총 6번 야스쿠니를 갔다.

그 때도 한·일관계가 최악이라고 했지만 그래도 두 정상 사이엔 최소한의 “대화가 통하는 사이”라는 신뢰는 있었다. 노 대통령은 취임 첫해 일본을 찾았고, 셔틀외교를 현실화했다. 기자들을 물리고 통역만 대동한 채 1시간 넘게 둘이서만 허심탄회한 시간을 갖기도 했다. 노 대통령은 “어려울수록 만나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둘은 서로 으르렁거릴지언정 각자 국내 정치상황을 고려할 수 밖에 없는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는 사이였다. 노 대통령은 고이즈미 총리가 직을 걸고 우정민영화를 추진하는 걸 보고 “총리에게 국회 해산권이 있는 게 부럽다”고 했지만 실은 고이즈미 총리도 “5년 임기가 보장된 한국 대통령이 참 부럽다”고 생각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총리는 어떤 사이일까. 안타깝게도 두 정상은 아직까지 제대로 된 정상회담을 한 적이 없다. 다자회의를 계기로 한 정상회담은 있었지만 상대국 정상을 초청해 지긋하게 한·일관계를 논의한 적이 없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5월 한·중·일 정상회담 때 당일치기로 도쿄를 찾은 것이 유일한 방일 기록이다. 아베 총리는 평창올림픽 개회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에 온 게 전부다. 정상을 대신할 측근 외교도 거의 작동을 안하고 있다.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추측과 짐작만 할 뿐이다.

혹자는 한·일 정상 간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두 정상이 지금까지 전화 대화를 포함해 17번이나 회담을 했고, 이는 전 정부와 비교하면 월등히 개선된 거라고 한다. 지난해 처음으로 한·일 간 왕래하는 국민이 1000만 명을 넘었다. 경제관계가 악화됐다는 지수가 잡히는 것도 아니니 한·일관계는 멀쩡히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한·일관계는 굉장히 비정상적이다. 비유하자면 ‘도넛’ 처럼 정상외교는 텅 비어 있고 주변부의 힘으로만 돌아가고 있는 그런 상태다. 중심이 탄탄하지 않은 관계는 작은 소동에도 삐걱린다. 그런 일들이 거듭되다가 구심력 없는 관계가 언제 부서지는 것 아닌지 우려가 나온다.

한·일 정상 간에 소통이 그렇게 잘 된다면 일본 정부가 북한 비핵화 논의에 자꾸 찬물을 끼얹는 것은 왜인지 설명이 안 된다. 주변국의 협조가 절실히 필요한 이때 말이다. 한·일관계가 정말 이대로 괜찮다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윤설영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