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임기가 3년 7개월 겹쳤다. 임기 초반 허니문 같은 시기도 있었지만 야스쿠니 신사 참배 강행, 역사교과서 갈등 등으로 두 정상은 거의 원수처럼 되고 말았다. 고이즈미 총리는 임기 막판이던 2006년 8월 15일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걸 포함해 임기 중 총 6번 야스쿠니를 갔다.
그 때도 한·일관계가 최악이라고 했지만 그래도 두 정상 사이엔 최소한의 “대화가 통하는 사이”라는 신뢰는 있었다. 노 대통령은 취임 첫해 일본을 찾았고, 셔틀외교를 현실화했다. 기자들을 물리고 통역만 대동한 채 1시간 넘게 둘이서만 허심탄회한 시간을 갖기도 했다. 노 대통령은 “어려울수록 만나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둘은 서로 으르렁거릴지언정 각자 국내 정치상황을 고려할 수 밖에 없는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는 사이였다. 노 대통령은 고이즈미 총리가 직을 걸고 우정민영화를 추진하는 걸 보고 “총리에게 국회 해산권이 있는 게 부럽다”고 했지만 실은 고이즈미 총리도 “5년 임기가 보장된 한국 대통령이 참 부럽다”고 생각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총리는 어떤 사이일까. 안타깝게도 두 정상은 아직까지 제대로 된 정상회담을 한 적이 없다. 다자회의를 계기로 한 정상회담은 있었지만 상대국 정상을 초청해 지긋하게 한·일관계를 논의한 적이 없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5월 한·중·일 정상회담 때 당일치기로 도쿄를 찾은 것이 유일한 방일 기록이다. 아베 총리는 평창올림픽 개회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에 온 게 전부다. 정상을 대신할 측근 외교도 거의 작동을 안하고 있다.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추측과 짐작만 할 뿐이다.
혹자는 한·일 정상 간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두 정상이 지금까지 전화 대화를 포함해 17번이나 회담을 했고, 이는 전 정부와 비교하면 월등히 개선된 거라고 한다. 지난해 처음으로 한·일 간 왕래하는 국민이 1000만 명을 넘었다. 경제관계가 악화됐다는 지수가 잡히는 것도 아니니 한·일관계는 멀쩡히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한·일관계는 굉장히 비정상적이다. 비유하자면 ‘도넛’ 처럼 정상외교는 텅 비어 있고 주변부의 힘으로만 돌아가고 있는 그런 상태다. 중심이 탄탄하지 않은 관계는 작은 소동에도 삐걱린다. 그런 일들이 거듭되다가 구심력 없는 관계가 언제 부서지는 것 아닌지 우려가 나온다.
한·일 정상 간에 소통이 그렇게 잘 된다면 일본 정부가 북한 비핵화 논의에 자꾸 찬물을 끼얹는 것은 왜인지 설명이 안 된다. 주변국의 협조가 절실히 필요한 이때 말이다. 한·일관계가 정말 이대로 괜찮다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윤설영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