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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에 선 지방경제…텅빈 공단 "기업 씨가 마를 지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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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정말 죽을 지경"

▶"요즘 광주 하남공단에서만 한달에 4~5곳이 부도난다. 업체 대표들이 잠적해 보이지 않는다"- 광주 남선하이테크 남재술 사장

▶"투자 부진, 소비 위축, 인력난, 태풍 피해 등 요즘 지방에는 좋은 단어가 하나도 없다"- 대전상공회의소 주원삼 사무국장

▶"기업들이 부산을 하나둘씩 떠나고 있다. 앞으로 부산은 무얼 먹고 살지 걱정을 안할 수 없다"- 부산 경성산업 김경조 사장

▶"상인들은 임대료도 못낼 판이다. 지방경제의 불황 여파가 음식점 등 상가에 바로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유성엽 전북 정읍시장

"이렇게 해달라"

▶"생색만 내는 정책 남발보다 업체가 필요한 게 뭔지 빨리 파악해 지원해줘야"- 대구 한국광학공업협동조합 박희중 전무

▶"태풍으로 기업피해가 크지만 보상을 받지 못한다. 지방.중소기업에도 공적 자금을 지원해 달라"- 대전 패널 제조업체 한평용 대표

▶"지방 이전 기업에는 세제.병역 혜택을 줘 수도권 인구를 분산해야"- 송기태 전주 상공회의소 회장

▶"지방에는 대기업 본사가 거의 없다. 본사를 각 지방으로 이전해 주민과 생사고락을 함께해야 한다"- 광주상공회의소 마형렬 회장

"우리도 책임"

▶"지방.중소기업들은 마케팅.자금 계획수립 등을 소홀히 하고 기술개발에만 몰두하는 게 문제다"- 임병길 한국무역협회 대전충남지부장

▶"지역경제 발전은 누군가 만들어 주는 게 아니다. 정부 정책에 더해, 지역사회 스스로 앞장서야 한다"- 심훈 부산은행장

▶"기업과 대학은 이기주의를 버리고 낙후된 지역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나서야 한다"- 한국산학협동연구원 박성수(전남대 경영대 교수)원장

▶"지나치게 정부에 기대려고만 하는 것도 문제다. 공장 운영한다고 융자 얻어 고의로 부도내고, 개인돈처럼 쓰는 경우도 있다. "- 대전 제조업체 D사 대표 A씨

전남 여수의 경제를 주도하는 여수국가산업단지 내 주요 대기업들은 최근 신.증설을 잇따라 포기하고 있다.

다국적기업인 바스프(BASF)는 총 4천억원 규모의 3차 화학공장 증설 추진을 중단하고, 대신 중국에 공장을 세울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앞서 LG화학도 이곳의 설비 증설을 하지 않고 중국 톈진(天津) 쪽으로 눈을 돌렸다. 또 호남석유화학도 당초 이곳에 증설을 추진하다가 대신 현대석유화학을 인수했다.

여수상공회의소 정병식 조사부장은 "지방에서도 대기업들이 일부 환경.시민단체의 반기업 정서 등으로 인해 공장 신.증설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내막을 잘 아는 중국은 한국을 떠나려는 기업을 잡기 위해 총력을 쏟고 있다.

지난 1일에는 중국 항저우(杭州)시상공연합회 자오톈싱(趙天行)부회장 등 9명이 지역 내 업체를 대상으로 "공장 부지를 무상으로 주겠다"며 투자 유치에 나서기도 했다.

반면 여수시가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추진하고 있는 율촌지방산업단지(1천54만평 규모) 등은 10년째 지지부진한 상태다. 기업들이 중국 등으로 속속 빠져 나가고 있는 가운데 '안방'에 있는 지역공단은 기업이 들어오지 않아 썰렁한 셈이다.

여수 경제의 또 다른 한축을 지탱하던 수산업도 이번 태풍 매미로 인해 거의 붕괴됐다. 우럭.농어.돔 등을 생산하던 국내 최대의 가두리 양식장 1만5천여대(1대 6×6m)가 대부분 쓸모없게 됐다. 어민들은 양식장을 복구해봐야 빚만 더 늘어난다며 재기 의욕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여수시의 한 관계자는 지난 19일 매미가 쓸고 간 양식장 등을 둘러본 뒤 "요즘 지방 경제는 엔진이 고장나 바퀴가 멈춰선 자동차와 다름없다"고 말했다.

투자.생산 부진과 태풍 피해만이 이 지역 경제를 '침체의 늪'으로 빠뜨리는 것은 아니다. 지역 경제에 돈도 거의 돌지 않고 있다는 호소다.

지난 5월 대형 유통점인 나산 클래프가 부도로 문을 닫는 등 지역 내 소비가 꽁꽁 얼어붙었다. 여수에서 택시를 운전하는 문정호씨는 "손님이 워낙 없다 보니 차를 2교대로 운영할 수 없어 오후 2시쯤 나와 저녁까지만 장사한다"며 "한달에 70만~80만원 벌어가기도 버겁다"고 말했다.

악화일로(惡化一路)의 지방 경제 사정은 호남지역뿐 아니다.

영남.충청.강원 등 다른 지방도 거의 비슷하다는 얘기다.

부산상공회의소의 김명수 조사담당 이사도 요즘 마음이 편치 않다.

부산 경제를 가까스로 지탱하던 2대축인 '항만.제조업'이 올 들어서는 침몰 지경이라는 위기감 때문이다.

金이사는 "올 들어 두 차례에 걸친 화물연대 파업뿐 아니라 매미로 인한 크레인 파손 등으로 부산이 동북아 중심항구가 아닌 지역항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다"고 말했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이 국내외 해운사 27곳을 설문 조사한 결과 절반 이상이 부산항을 떠날 가능성이 있다고 응답할 정도다.

박인호 부산경제살리기시민연대 대표는 "부산시와 언론, 시민 등이 힘을 합쳐 '부산에서 공장하기 운동'을 벌일 방침"이라며 "지역 연고 기업이 부가가치와 고용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규제완화, 인력 공급 등 행정적 지원도 뒤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전통산업 포기, 관광으로 눈길=요즘 지방에서는 '관광지 개발 붐'이 거세게 불고 있다. 전국의 웬만한 지자체는 대부분 전통산업인 제조업.농어업 등을 포기하고 관광산업 육성에 발벗고 나섰다.

정부는 지역 경제 활성화 대책으로 내년부터 '지역특화발전특구제도'를 도입하기로 했다. 이는 지역 특성에 맞게 산업을 육성.발전시키기 위해 규제 등을 특별히 완화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전국 시.군.구에서 4백48개의 특구를 신청한 가운데 관광분야에만 1백33건(29.7%)이 몰렸다. 레저스포츠.문화.환경 등까지 포함하면 무려 3백26건(72.6%)에 이른다. 각 지방의 경제를 지탱해 오던 전통산업인 제조.농림수산.연구개발 분야는 1백22건(27.4%)에 불과했다.

◇대안은 없나=대구.경북개발연구원의 이정인 지역연구실장은 "지방 경제 붕괴를 막는다며 융자 혜택 등을 주는 식의 단기적인 해결책은 이제 효과가 없다"며 "정부가 진짜 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부터 해야 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공장이 있는 것과 기업이 있는 것은 다르다"며 "지방에 공장뿐 아니라 기업 본사가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산업클러스터.광역자족도시 등도 지방 문제 해결책으로 제시됐다.

삼성경제연구소 박용규 수석연구원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지역별 혁신 역량을 키우는 것이 시급하다"며 "각 지역 특성에 맞는 전략산업 중심의 클러스터, 광역자족도시 등을 조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시래.염태정 기자, 전국팀

*** 바로잡습니다

9월 29일자 E3면 '벼랑에선 지방경제' 기사 중 '바스프는 총 4천억원 규모의 3차 화학공장 증설 추진을 중단하고…'라는 내용에 대해 바스프는 "2000년 발표한 4억유로 투자 계획에 따라 신.증설을 차질없이 진행하고 있다"고 밝혀 왔기에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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