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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잘나가고 싶었던 판사님들에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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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박태인 기자 중앙일보 정치부 기자
박태인 사회팀 기자

박태인 사회팀 기자

“이미 판사가 되셨는데도 더 잘나가고 싶었나봐요?”

전·현직 판사를 만날 때마다 물었다.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취재하면서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미 사회적 존경을 받는 법관이란 직위에 올랐는데 왜 ‘윗선’의 부당한 지시를 거부하지 못했을까. 뭘 그리 더 잘나가고 싶었을까. ‘판사님’은 그래도 조금 다를 것이란 기대감도 섞여 있었다.

대법원 재판연구관을 지낸 변호사가 고개를 흔들며 반문했다. “시골에서 음주운전 판결만 하고 싶겠어?” 법원에서 ‘잘나갔던’ 고등법원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는 “저도 젊었을 때는 다를 줄 알았는데 판사도 다 똑같더라고요”라고 말했다. 자신을 시기하고 부러워했던 판사들이 그의 생각을 바꿔 놓았다고 했다.

취재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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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만 했던 사람들이니 뒤처짐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란 관성적 사고가 작동했다. 그때 “스님과 목사님도 출세욕이 있는데 판사라고 다르겠나”는 다른 변호사의 말이 나왔다. 아, 판사도 승진하고 출세해서 잘나가고 싶은 직장인이었구나.

양 전 대법원장이 11일 구속기소됐다. 전직 사법수장이 구속기소되자 시선은 현직 수장인 김명수 대법원장에게 쏠린다. 김 대법원장은 12일 국민에게 사과하며 사법제도 개혁을 약속했다. 하지만 이런 시선은 이번 사태의 뿌리를 드러낼 수 없다. 윗선에 모든 책임을 묻기에는 그들의 공소장에 등장하는 판사들의 이름이 너무 많다. 이들의 도움이 없이 양승태 대법원은 없었다. 마찬가지로 일선 판사들의 도움 없는 김명수 대법원의 개혁도 공허할 뿐이다. 국회의원 재판 청탁을 전달한 국회 파견판사, “막아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그 청탁을 일선 판사에게 전달한 법원장. 대법원을 비판하고 사회적 문제에 목소리를 냈던 판사들에게 인사 조치를 한 부장판사, 윗선의 지시에 판결문을 수정하고 구속영장 기밀을 보고했던 평판사들까지 모두 기억해야 한다.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헌법 제103조)는 법관들의 모습은 다른 조직원들과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은 소위 잘나가는 판사였다. 명문대를 나와 사법시험에 붙었다. 똑똑했다. 딱 거기까지였다.

물론 매일 수천 쪽의 기록을 읽고 억울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며 재판을 하는 판사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수장과 조직에만 책임을 묻기에는 판사의 자리가 가볍지 않다. 판사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법원의 미래는 없다.

박태인 사회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