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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돌발 드라마'… 2006년은 '준비된 축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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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24일 새벽 한국-스위스전이 대형 전광판으로 중계되던 서울 시청 앞 광장. 한국팀의 패배가 점차 굳어져 갔지만 시민들의 '대~한민국' 외침은 줄어들지 않았다. 안타까운 패배. 16강 탈락의 아쉬움. 월드컵은 한동안 계속될 터이지만 우리의 작은 축제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하지만 우리 모두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솟구치는 대한민국의 희망을 보았다. 당당하게 싸웠고, 아름답게 즐겼다. 경기장에서, 거리에서, 안방에서 태극전사와 붉은 악마 모두 다시 한번 하나가 됐다. 월드컵 축구를 우리의 축제로 승화시킨 것은 우리의 새로운 미덕이 됐다. 안성식 기자

월드컵 16강 진출이 좌절된 24일 오후 서울시청 앞에서 정준영(右)(한국방송통신대 문화교양학과).윤태진(연세대 영상대학원) 교수가 만나 '제도화된 월드컵 축제'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박종근 기자

태극전사와 붉은악마가 함께 펼치는 월드컵 축제는 이제 하나의 '제도'로 자리 잡았다. 목이 터져라 외치고 또 외친 '대~한민국'은 2002년 이후 4년 만에 오래된 습관처럼 우리를 파고들었다. 2002년의 열기는 각본 없는 돌발 드라마였다. 하지만 2006년의 함성은 기획된 측면이 강했다. 16강에 진출하지 못한 아쉬움은 크다. 하지만 우리의 저력을 지구촌 전체에 알렸다는 뿌듯함이 그 아쉬움을 뛰어넘는다. 주눅 들지 않고 세계와 당당히 맞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확인했다. 전국의 대도시와 각종 미디어에서 전방위로 전개된 축제의 의미를 되짚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정준영(43.한국방송통신대 문화교양학과.사회학 전공) 교수와 윤태진(42.연세대 영상대학원.미디어 전공) 교수가 24일 한국-스위스전이 끝난 직후 만나 월드컵의 겉과 속을 짚어봤다. 두 명 모두 월드컵의 축제성을 문화.미디어 측면에서 활발하게 비평해온 소장학자다.

◆ 2002 vs 2006:월드컵 축제의 제도화

정준영=예전엔 어이없이 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제 주눅 든 모습은 사라지고 월드컵 정도는 당당하게 임하는 여유가 생겼다. 체력 문제로 후반에 고전했던 때가 언제인가 싶다.

윤태진=4년에 한 번씩 소리지르며 욕구를 분출하는 전통이 생겼다. 월드컵 축제가 제도화된 것이다. 한국인의 체력과 자신감이 커졌다는 데 공감한다. 국가의 위상이 어떤 벽을 하나 넘어선 것 같다.

정=올해는 특히 아줌마들이 월드컵을 기다리며 준비한 점이 돋보인다. 방송통신대 학생의 경우 다수를 차지하는 30.40대 여성에게서 그런 경향은 두드러졌다. 문화계 전반으로 퍼졌던 '아줌마의 힘'이 스포츠에까지 확장된 것 같다. 아줌마들의 응원을 보면서 2006년에는 응원의 자발성이 훨씬 강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자발성이 늘었다는 의견에 반대한다. 2002년의 거리 응원은 돌발 사태였다. 미디어 보도 이후 거리 응원이 크게 늘었지만 기획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엔 월드컵에 대한 관심.응원 등이 미리 기획됐다. 물론 사람들이 거리에 끌려나온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본이나 미디어의 상업적 목적에 의해 동원된 측면이 강하다.

정=제도적 틀을 만든 것은 물론 자본과 미디어다. 그렇지만 그것을 나의 일상으로 받아들인 것은 자발성이라고 본다. 월드컵이 사람들의 일상이 된 것이다.

윤=남녀의 연애에 비유하면 2002년은 첫눈에 반해 결혼한 것이라면 이번엔 결혼정보회사의 도움을 받은 모양새다. 결혼정보회사 자체가 잘못이란 뜻은 아니다. 2002년과의 차이가 그렇다는 것이다. 그 속에 담긴 상업적 욕망을 지적하고 싶다.

◆ 대한민국 구호 일원화:광장문화의 이중성

정=한국인은 축구를 즐기기보다 한국 팀의 승패에 집착하는 경향이 강하다. 한풀이 비슷한 그 어떤 게 이번에도 발견된다.

윤=우리가 열광하는 데는 세 가지 측면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축구 자체 즐기기, 한국 팀의 승리 염원, 그리고 억압된 욕망의 분출구 찾기다. 이 중 축구를 즐기는 측면이 가장 약하다. 대한민국에 대한 관심이지 축구에 대한 관심이 아닌 것이다. 월드컵 열기가 K-리그로 연결되지 않는 현실을 주목하자.

정=2002년엔 한국이란 말도 많이 썼다. 그런데 올해는 대한민국으로 용어가 통일됐다. 우리를 지칭할 땐 언제나 대한민국이다. 개인의 다양성이 무시되고 민족.국가주의로 획일화되는 부정적 측면을 지적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이란 구호는 수많은 차별을 없애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사회적 갈등을 줄이는 긍정적 기능이 있다. 올해 참가자들의 옷차림과 응원 도구가 다양해진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그만큼 개인이 즐기는 범위가 넓어진 셈이다.

윤=전체의 일부로 동원될 마음의 준비가 돼 있는 것 같아 두렵게 느껴졌다. 2002년 우리는 새롭게 등장한 광장문화에 놀랐다. 그런데 광장의 이중성을 함께 봐야 한다.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대중동원, 즉 전체주의는 광장이 없었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젊은 세대가 광장을 이용하는 방식은 기성세대와 다르다. 일단 즐기고 본다. 2002년엔 대형 전광판 앞으로 모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광장이 형성됐다.이번엔 광장을 미리 만들어 지정해 놓고 사람들을 불러들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윤=2002년 '대~한민국' 응원의 정치적 수혜자는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월드컵 응원의 '집단적 행태'가 효순이.미선이의 죽음에 대한 저항 촛불시위로 연결됐던 당시 분위기는 노무현 후보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런데 '대~한민국' 구호 아래 모이는 일 자체만 놓고 보수적, 혹은 진보적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 붉은색으로 도배된 편성표:중계방송의 상업성

정=국제축구연맹(FIFA)부터 상업성 강화에 앞장섰다. 거리의 전광판과 음식점의 대형 TV에도 중계료를 부과했다. 국내에선 서울광장을 차지하려는 대기업들의 다툼도 있었다. 언론사들도 그들의 컨소시엄에 참여했다. TV의 경우 광고료 수입과 긴밀히 연관돼 있다.

윤=붉은색으로 도배된 TV 편성표를 보라. 뉴스까지 월드컵 특집으로 편성표에 찍혀 나오는 것은 코미디다. 16강에 진출했다면 1년 평균 수익의 절반 이상을 중계 광고료로 얻었을 것이다.

정=프로그램뿐만 아니라 광고도 월드컵과 관련되지 않은 것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사람들의 머리를 월드컵으로만 채우려 했다.

윤=대형 건물마다 어마어마한 광고물을 부착했다. 모 언론사의 경우 건물에 부착한 대형 광고에 특정 상품의 로고를 어마어마한 크기로 그려놓기까지 했다. 같은 경기를 3개 지상파 방송사가 나란히 내보냈다. 어떻게든 붐을 일으켜 월드컵을 보게 해야 하겠는데 축구만으론 안 되니까 대한민국을 끌어들였다. '애국주의의 상품화'다.

정=언론에서 대한민국을 전면으로 내세운 경향이 짙다. 지난해 주한미군방송 (AFN)에서 'I am an American!'이란 광고 문구를 본 적이 있다. 오늘날 분열된 미국의 사회상을 반영한 광고다. 우리도 부의 양극화, 이념의 양극화 등으로 사회가 조각 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모두 똑같다'는 식의 평등주의가 팽배해 있다. 평등주의가 조금씩 깨져 나가는 게 두려운 것이고 또 그 두려움에 대한 반발로, 즉 사회가 다시 하나로 통합됐으면 하는 감정들이 대한민국으로 표현된 것은 아닌지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 축제, 억눌린 욕구의 해방구

정=응원문화가 올해 좀 더 자연스러워진 것 같다. 토고전 직후 거리의 쓰레기를 보자. 2002년엔 쓰레기를 치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주최국 시민으로 외국인의 시선을 의식했을 것이다. 이번에는 이런 측면에 신경을 끊은 셈이다. 언론에서 시민의식을 강조하자 프랑스전 이후엔 쓰레기를 치우는 모습을 보였다.

윤=2002년엔 자발성이 강했기 때문에 쓰레기도 내 쓰레기라고 생각해 주웠다. 이번엔 참여자보다 관람자의 성격이 컸다. 대기업에서 주관하는 월드컵 공연을 보러 간다는 생각이 생긴 것이다. 응원 주관회사가 청소 용역업체도 준비했다. 그만큼 시민들의 책임감이 약해진 것이다.

정=2002년 4강 진입은 워낙 큰 사건이었다. 충격이 컸던 만큼 후유증도 걱정됐었다. 올해에는 일찌감치 16강 진출에 실패해 2000년보다 평정심을 빨리 되찾을 것 같다. 월드컵은 일상의 스트레스를 푸는 축제다. 언론도 시민들이 일상으로 잘 돌아가도록 차분해졌으면 한다.

윤=월드컵 기간 중 미디어는 한.미 자유무역협정, 사학법 등 여러 현안을 제쳐 놓고 월드컵에만 매달렸다. 아프리카에 토고라는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게 기여라면 기여랄까.

정=각국의 다양한 문화를 존중하는 계기를 마련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 2010년의 '대~한민국'

정=2010년엔 본선 진출도 만만치 않다. 호주가 아시아권에 포함됐고, 아시아 티켓이 줄어들 수도 있다. 응원문화는 더 발전할 것이다. 개성화도 진전될 것으로 보인다. 동양적 집단성과 서구적 개인성이 조화된 독창적 모델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윤=미디어 전략도 바뀔 것이다. 이번에 너무 '오버'했으니까. 착실한 준비로 '일시적 투기'가 아닌 '장기적 투자'로 바뀌기를 기대한다.

정리=배영대 기자 <balance@joongang.co.kr>
사진=안성식 기자 <ansesi@joongang.co.kr>
사진=박종근 기자 <joke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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