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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비무장지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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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동현
이동현 기자 중앙일보 기자
이동현 산업1팀 차장대우

이동현 산업1팀 차장대우

한반도에 실재하는 ‘비무장지대’는 이름 자체만으로 부조리한 말이다. 1953년 정전협정이 체결된 뒤 남북은 수시로 상대방이 ‘중화기를 비무장지대에 반입해 정전협정을 위반했다’고 비난했다. 실제 일촉즉발의 상황과 충돌이 수없이 발생했다.

이름과 달리 비무장지대는 재래식 전력이 집중돼 있는 ‘중무장지대’였다. 하지만 정전협정 전문엔 중화기 반입 금지조항이 규정돼 있지 않다. 이 조항이 담긴 건 정전협정 이후 마련된 군사정전위원회 부속합의서다. 합의서엔 ‘보총(소총의 북한식 용어)과 권총으로만 무장한다’는 조항을 뒀다. 우발적인 충돌을 막기 위해 최소한의 무장만 허용한다는 의미다.

당시 협정과 합의서는 불과 몇 년 뒤의 무기 발달조차 담지 못했다. 한국전쟁 당시만 해도 국군과 유엔군은 물론, 북한군과 중국군 역시 자동소총을 개인화기로 휴대하지 못했다. 북한군이 소련이 개발한 AK-47 소총을 라이선스 생산한 것은 58년으로, 북한에서는 이 총을 ‘58식 보총’이라 부른다. 한국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뒤 미군의 M16A1 소총을 불하받았고 74년에서야 라이선스 생산을 시작했다.

제한된 인원만 출입할 수 있었던 탓에 비무장지대 안엔 60년이 넘는 원시림이 보존돼 있다. 기자가 근무했던 동부전선 GP(경계초소)는 그 원시림 한가운데 절해고도처럼 솟아 있었다. GP 안 고가초소에서 바라보면 끝없이 펼쳐진 원시림 위로 솔개가 활공하고 깎아지른 절벽엔 산양이 거짓말처럼 뛰어다녔다. 26개월의 군 생활 동안 비무장지대의 사계절을 함께 했다.

보급로를 막고 한가로이 낮잠을 청하던 멧돼지 가족, 강아지처럼 주변을 뛰어다니던 까투리. 제초작업을 마쳐도 한나절이면 금세 허리춤까지 올라오던 민들레며 이름 모를 들꽃들. 야간 점호 시간에 내무반에 뛰어들던 고라니. 비현실적인 광경들은 현실을 압도했다.

남북은 지난해 말 11개의 GP를 시범 철수했다. 성곽처럼 솟아있던 GP 시설을 파괴하고 서로 검증까지 마쳤다. 서로를 겨누던 중화기들도 사라졌다. 아직 수많은 재래식 전력이 남아있지만 비무장지대가 본래 이름대로 평화로운 원시림으로 돌아갈 날도 이제 상상 속 일만은 아니다.

설 연휴 기간 들려온 2차 북·미 정상회담은 기대감을 더 높인다.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지만, 반세기 넘게 머리 위에 이고 살아온 전쟁의 공포가 사라진다면 비무장지대의 원시림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지 궁리해봐도 좋겠다.

이동현 산업1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