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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극장 『마지막 한잔을 위하여』|고문의 잔혹성 무대서 고발|가해자-희생자의 비인간적 심리 그려 "예술성 살린 정치극 새로운 모델 제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최근 몇년 사이만 해도 부천서 성고문사건·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등 우리사회를 충격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고문사건이 잇따라 터졌다. 이들 고문사건의 충격파가 아직도 완전히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고문현실을 다룬 연극이 준비되고 있어 큰 관심을 모은다.
실험극장(대표 김동훈)이 최근 대폭 보수공사를 끝낸 전용공연장 실험소극장(서울 종로구 운니동114)의 개축기념 특별공연겸 제111회 공연으로 오는 14일부터 무대에 올릴 『마지막 한잔을 위하여』가 바로 그 화제작.
영국작가 「헤럴드·핀터」가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하는 고문의 잔혹성을 정면으로 고발한 이 작품은 터키의 한 지성인 일가족이 고문에 의해 차례로 몰살되는 상황을 통해 고문자와 희생자의 비인간적 심리를 무한한 상상력으로 그려냈다.
이 작품의 집필 동기가 정권유지를 위한 필요악으로서의 고문이 묵시적으로 합법시되고 있는 상황을 도저히 외면할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희곡 첫머리에 따로 밝힌 다음과 같은「작가의 의도」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들은 국가에 반역하는 어떠한 실제적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수백명의 사람들은 2∼4년동안 아무런 재판도 없이 수감됐습니다. …그들은 고문의 대상이 됐습니다. 우리는 갖가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생의 파멸을 겪은 사람들, 자신과 친척의 고문을 겪은 사람들을, 터키의 모든 강력한 권력은 군대가 쥐고 있습니다. 이런상태를 미국은 지지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미국의 지원은 민주주의를 위해 깨끗한 세계를 유지하고자(?) 싸우느라고 그러는 겁니다.』 이번에 공연될 이 연극은 1부와 2부로 나뉘어지는데, 1부는 작가인「헤럴드·핀터」와 기진「니콜라스·현」의 인터뷰로 진행된다. 여기서 작가는『인간이 만든 재앙인 고문은 마땅히 근절돼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인류에 희망이란 없다』고 역설한다. 이같은 인터뷰가 이어지는 사이 전세계 각국의 고문현실을 보여주는 슬라이드가 상영된다.
2부는「니콜라스」가 자신의 절대권력을 과시하듯 무고한 지성인「빅터」를 손가락으로 조종하면서「빅터」의 아내「질라」를 성고문한 사실을 암시하는 비열한 이야기로 「빅터」를 괴롭힌다.『차라리죽여달라』고 애원하던 「빅터」는 결국 혀가뽁히고 그의 아들「니키」는 군인들에게 침을 뱉고 발길질하며 대들었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게 된다.
또 숱한 남자들로부터 강간당한「질라」역시 또다시 권력자의 하수인들에게 성고문을 당한다.
무대위에서 잔혹한 고문장면을 직접 보여주지는 않지만 대사와 침묵을 통해 관객의 상상력을 움직여 고문의 실상을 극대화시킨다.
지난해『사의 찬미』를 연출하여 동아연극대상을 수상한 중진연출가 윤호진씨가 연출, 역시 『사의 찬미』 로 동아연극미술상을 수상한 윤정섭씨가 미술을 맡아 더욱 기대를 모으는 무대다.
연출가 윤씨는『피해자의 인간성에 지울수 없는 상처를 입힐뿐 아니라 가해자 역시 비인간화시키는 고문이 아직도 이 땅에 존재한다는 것은 이루 말할수 없는 치욕』이라면서 『종래의 거친 정치극·형태에서 벗어나 관객들이 생각하면서 예술성을 누릴수 있는 연극의 한 모델을 제시해 보겠다』고 다짐했다.
잔혹한 새디즘을 즐기는 고문자 「니콜라스」역은 윤주상씨, 고뇌하는 지성인희생자 「빅터」역은 윤여성씨, 청순하고 아름다운「빅터」의 아내「질라」역은 윤영숙씨가 각각 맡는다. 번역은 구희서씨. <김경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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