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세」가 굴러다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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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파리나 로마를 처음 방문한 여행객이면 누구나 도심을 누비는 대부분의 승용차가 의외로 소형인데 놀란다.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를 훨씬 넘는 유럽의 부국 국민들이 우리 나라의 프라이드나 엑셀보다 더 작은 소형차를 몰고 직장에 출·퇴근하는 것은 물론 주말이나 바캉스 철엔 가족 또는 친구들을 가득 태우고 교외를 달리는 모습을 보면 그 사회가 참으로 건강한 듯 느껴진다.
거리에 소형차가 많은 것은 영국이나 독일도 마찬가지다. 세계적인 롤스로이스와 폴크스바겐을 생산하는 나라의 국민들이 너무 오래 타서 도장이 벗겨진 낡은 소형차를 몰고 다니는 것은 소득이 우리보다 낮거나 인색해서 만은 아니다. 그것은 몸에 밴 근검절약과 함께 우선 나다니기에 편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웃이 고급차를 몰고 다닌다고 부러워하거나 열등감 같은 것을 갖지 않는다. 그들은 승용차로 사람의 인격을 재거나 신분과 지위를 가늠하지 않는다. 자기분수에 맞게 허세를 부리지 않고 편리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활관이다.
그에 비해 서울의 거리는 어떤가. 차종도 별로 많지 않은 터에 눈에 띄는 것은 거의가 중형차·대형차의 물결이다.
비록 집은 전세를 살망정 자가용차부터 먼저 장만 하는게 요즘의 풍조처럼 되었다.「4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대로 이웃이 고급차를 사들이면 뒤질세라 자기도 고급차로 바꿔야만 직성이 풀리는게 우리네의 심성인가.
안 그래도 과소비풍조로 우리 경제가 휘청거리는 실정인데 자동차의 사치는 이를 더욱 부채질하는 느낌이다.
사회 밑바닥에 짙게 깔린 이 빗나간 자기 과시욕과 허세풍조는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한마디로 자신감의 결여나 열등감의 소치라고 밖에 달리 해석할 도리가 없다.
그러나 이 같은 중형차·대형차 선호현상을 타는 사람만 나무랄 수 없는데도 문제가 있다. 실체로 호텔이나 관공서 같은데 소형차를 타고 가면 수의들이 괄시하거나 방문목적을 꼬치꼬치 캐묻기 일쑤다. 골프장 같은데 서는 캐디들로부터「포돌이」니, 뭐니 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한다. 교통순경마저도 대형차의 교통위반에는 관대하다는 것이 택시 기사들의 얘기다.
이런 사회풍조 때문에 같은 차라도 기본형 대신 고급형으로 장식을 바꾸거나 안테나를 요란하게 달고 다니는 차도 많다.
통계를 보면 일본과 서독의 소형차(5백∼1천5백cc)는 전체 승용차의 약40%, 프랑스는 50%, 영국은46%, 이탈리아는 63%나 된다.
이에 비해 우리 나라의 경우 금년 1월부터 4월까지의 통계로 약64%의 소형차가 팔린 것으로 나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의 소형차가 파리나 런던 보다 적은 것은 자동차의 배기량에 비해 차체를 너무 크게 만든 이른바「과대 포장」에 있다. 따라서 에너지의 낭비도 낭비지만 엔진에 무리를 주는 과부하는 교통사고의 원인이 된다.
더구나 도로율이 이들 선진국에 비해 낮고 주차장이 모자라 쩔쩔매는 형편에 이 같은 「과대포장차」가 거리를 메운다는 것은 소비자를 탓하기 전에 먼저 자동차 제작사와 정책당국의 책임이 더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건전한 자동차 문화는 허세가 없는 차종의 제작과 선택에서 찾아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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