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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첩보전? 파벌 희생양? 中비판 호주국적자 체포 미스터리

중앙일보

입력

양헝쥔(楊恒均·본명 양쥔·楊軍)이 지난 2014년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신중국 건국 55주년 기념 리셉션장에서 찍은 사진 [인터넷 캡처]

양헝쥔(楊恒均·본명 양쥔·楊軍)이 지난 2014년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신중국 건국 55주년 기념 리셉션장에서 찍은 사진 [인터넷 캡처]

 “내가 돌연 사라진다면? 반세기 동안 수십 개 나라에서 살아봤고, 범죄 기록 하나 없지만 이런 생활과 이런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나.”

중국계 호주 국적의 시사평론가 양헝쥔(楊恒均·54, 본명 양쥔·楊軍)이 지난 12일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微博)에 남긴 말이다. 중국의 민주화 개혁을 주장하는 반체제 인사로 알려진 그는 이로부터 일주일 후 중국에서 실종됐다. 호주 정부는 지난 23일(현지시간)에야 중국 지방 당국에 의해 양헝쥔이 억류됐다는 걸 알게 됐다. 미·중 무역전쟁이 한창인 가운데 중국과 미 동맹국 간에 또 하나의 갈등이 불을 지핀 셈이다.

웨이보에 글을 남길 당시 양헝쥔은 뉴욕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유럽 이민을 위해 그간 거주했던 나라들에서 범죄 기록 조회를 신청했다가 '깨끗한 기록'을 보고선 소회를 이렇게 남겼다. 미국 사법부가 보낸 듯한 ‘FIRST CLASS’(일급기밀이란 의미)라는 문자가 선명한 노란 봉투 사진도 함께였다.

이후 18일 뉴욕을 출발한 양헝쥔은 다음날 광저우(廣州) 공항에서 상하이로 환승하던 중 사라졌다. 그의 체포 사실이 알려진 건 지인을 통해서였다.

19일 광저우에서 사라진 뒤 중국 공안부문에 체포된 양헝쥔의 12일자 웨이보. ’어느날 홀연히 사라진다면“이라는 문구와 미국 사법부가 보낸 봉투 사진을 함께 올렸다. [웨이보 캡처]

19일 광저우에서 사라진 뒤 중국 공안부문에 체포된 양헝쥔의 12일자 웨이보. ’어느날 홀연히 사라진다면“이라는 문구와 미국 사법부가 보낸 봉투 사진을 함께 올렸다. [웨이보 캡처]

멍완저우(孟晩舟) 화웨이 재무책임자(CFO) 체포 사태 이후 중국이 캐나다 등 미 동맹국과 갈등을 겪는 상황에서 호주 국적 양헝쥔의 실종설이 돌자 외신들은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중국 정부의 대응은 갈지자였다.

23일 화춘잉(華春瑩)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정보가 없다. 관계 당국에 물어보라”며 모르쇠로 일관했다. 중국이 알리고 싶지 않은 민감한 사안을 대하는 방식이다.

이튿날 호주 언론이 체포설을 내자 화 대변인의 반응이 바뀌었다. “호주 국적의 양쥔(楊軍·과거 외교관 시절 본명)은 중국 국가 안보를 해친 범죄 활동에 종사한 혐의로 베이징시 국가안전국이 최근 법에 따라 ‘강제조치(체포 연행을 의미하는 중국 외교부식 용어)’를 취해 조사를 진행 중”이라고 대답했다. 체포를 인정한 발언이다.

다음날 한 외신 기자가 양헝쥔 구금과 관련된 자세한 정보를 물었다. 화 대변인은 “어제 이미 밝혔다”며 “중국은 호주와 영사 소통 채널로 이야기했다. 호주는 영사 접견을 포함해 영사 업무 협조를 이행했다. 양쥔의 합법적 권리는 충분히 보장받았다”고 기계적으로 답했다.

호주 언론은 중국 정부가 스파이 혐의로 양헝쥔을 체포했으며 즉각 석방을 위해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호주 외교통상부는 24일 “중국 정부가 23일 주 베이징 호주 대사관에 양헝쥔을 국가 안보 침해 혐의로 체포한 사실을 통보했다”고 밝혔다. 양헝쥔의 변호사는 그가 “구속 상태가 아니라 모처에서 심문을 받는 중”이라고 알렸다.

양헝쥔의 상하이 푸단대 국제정치학과 졸업사진. 앞줄 가운데 당시 과 주임이던 왕후닝 현 정치국 상무위원이 보인다. [사진=신경진 특파원]

양헝쥔의 상하이 푸단대 국제정치학과 졸업사진. 앞줄 가운데 당시 과 주임이던 왕후닝 현 정치국 상무위원이 보인다. [사진=신경진 특파원]

주목할 것은 그의 체포 사실이 알려진 후 중국 소셜미디어와 중화권 매체가 양헝쥔 부부의 특이한 경력을 퍼나르는 데 열심이란 점이다. 이에 따르면 양헝쥔은 중국 최고 수뇌부의 대학 제자 출신으로 애초에 중국 외교관으로서 홍콩·미국 등지에서 활약했다. 부인은 유명한 반미(反美) 댓글 부대 우두머리이기도 하다. 특히 부인은 양헝쥔이 실종을 예감한 글을 올린 이튿날인 13일 트위터에 “미국은 어떻게 중국을 상대로 정보공작을 펼치나”란 2014년 글을 다시 올리기도 했다. 그런 그가 왜 '국가 안보 침해 혐의'로 조사받는 신세가 된 걸까.

◇3대 책사 왕후닝 현 상무위원의 제자 양쥔
양헝쥔은 1983년 상하이의 명문 푸단(復旦)대 국제정치학과에 입학했다. 장쩌민(江澤民)·후진타오(胡錦濤)·시진핑(習近平) 주석의 이론을 만들어 ‘3대 책사’로 불리는 왕후닝(王滬寧) 현 정치국 상무위원(권력서열 5위)이 국제정치학과 부교수 겸 학과장이었다. 푸단대 국제정치학과 사무실 벽에 붙은 87년 졸업반 사진 정중앙에는 왕 상무위원이 지도 교수 자격으로 앉아있다.

26일 홍콩 명보에 따르면 양헝쥔은 줄곧 왕후닝의 제자임을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강조해왔다고 한다. 양은 과거 개인 블로그에 발표한 ‘왕후닝 두 세 가지 일’이란 글에서 83년 입학 후 “교수와 박사의 차이를 물었다”는 등 둘 사이에 오갔던 사적인 대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양헝쥔은 당시 왕후닝이 파벌을 맺지도, 패거리를 만들지도 않고, 학생이나 동료 교수와도 친근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정작 양헝쥔은 베이징을 갈 때마다 ‘옛 상관’을 만난다고 말했다. 앞서 왕후닝이 서클을 맺지 않는다고 말한 것과 배치되는 발언이다.

양헝쥔은 대학 졸업 후 외교부와 국가안전부에서 일했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1997년 미국 싱크탱크 애틀란틱 카운슬에서 국제전략 연구 분야에서 일했으며 2000년에는 워싱턴과 시드니에서 국제 문제를 연구했다. 2002년부터 『치명 약점』,『치명 무기』,『치명 암살』스파이 소설 치명 3부작을 완성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땐 성화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1만명이 넘는 중국계 청년들이 오성홍기를 들고 호주 수도 캔버라에서 시위를 벌인 사건을 두고 '중국이 호주 내정에 간섭하는 증거'라고 주장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반체제 발언으로 주목받던 중인 2011년, 이번처럼 광저우 공항에서 돌연 실종됐다. 중국 체제 전복을 시도한 ‘모리화 혁명’을 지지한 글을 발표한 지 한 달 만이었다. 그런데 이후 호주에 나타나선 실종이 ‘오해’라고 해명했다고 한다.

양은 미국에 머물면서 대형 포럼을 여러차례 꾸렸다. 참가자에게 항공권을 제공하고 크루즈 여행권과 와이너리 참관, 배우자 동반도 허용했다. 1인당 접대비로만 수천 달러를 지출했다. 때문에 해외에서 활동하는 중국 민주화 운동권에선 양헝쥔 배후에 ‘전주(錢主)’가 있다는 의심이 돌았다.

이런 보도들은 양헝쥔이 서구 언론에서 판단하는대로 '반체제 인사로서 탄압받는 것이 아니다'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양헝쥔과 왕후닝의 사제관계를 밝힌 홍콩 명보 기사는 아예 “그가 중국 공산당을 위해 일했는지 특정 파벌을 위해 활동했는지 모른다”고 썼다. 그러면서 “중국 공산당은 지금 ‘이중 인물’을 청산 중이다. 양헝쥔의 체포가 충성하지 않음이 폭로된 것인지 파벌 간 다툼에 휩쓸린 것인지 알 수 없다”고 끝을 맺었다.

과연 양헝쥔이 자신이 쓴 소설 주인공처럼 미국과 중국을 오가는 이중 스파이였는지, 탄압받는 반체제 인사인지, 나아가 중국 파벌 다툼의 희생양인지 미스터리가 증폭되고 있다.

베이징=신경진 특파원 shin.kyung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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