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득의대한민국남편들아] 일요일 청소 공방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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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아침, 회사 나갈 채비를 하자 아내가 강하게 압박한다. "일요일인데 어딜 나가요?" "당직이야." "당직이란 말 안 했잖아." "지금 하잖아." "그런 건 미리 말하면 안 돼?" "안 될 거야 없지만 그러면 미리부터 화낼 거잖아." "회사에 꿀단지라도 있어? 일요일도 나가게."

회사에 꿀단지는 없다. 그러나 늦은 아침 버스를 타면 마치 여행이라도 가는 기분이 든다. 아홉 시의 햇살은 사랑스럽다. 차창 밖으로는 푸른 유월이 느긋하게 흘러간다. 나는 읽던 책을 덮고 잠시 눈을 감는다. 얼마 만에 누려보는 평화인가. 집에 있으면 청소도 해야 하고, 할 일이 태산일 텐데.

일요 당직은 아무래도 소강상태다. 바쁜 시간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평일이나 주말에 비하랴. 안내하는 틈틈이 인터넷도 하고 책도 읽고 어쩌면 글도 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불을 켜고 음악을 틀고 의자를 정리하고 탁자 유리를 닦는다. 대강 정리를 마치고 커피라도 한잔 타먹으려고 보니 물이 안 나온다. 편의점에서 생수와 녹차와 오렌지 주스를 사와 냉장고에 넣어둔다. 인터넷이나 좀 할까 했는데 인터넷도 시스템 점검하느라 안 되고 책을 펼쳤는데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전 열한 시 아내로부터 전화가 온다. 아침 먹고 큰 녀석은 독서실로, 작은놈은 과외 보충 가고 자기만 혼자 남았다고 아내는 툴툴거린다.

오후의 나른한 눈꺼풀 위에 무거운 시간이 올라탄다. 근무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버틴다. 오후 세 시 아내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온다. "뭐 해?" "뭐하긴 일하지." 그리고 또 존다. 다섯 시를 넘어서자 잠도 달아나고 휴대전화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여섯 시의 문전으로 아내의 문자 메시지가 쇄도한다. "안 와?" "언제 와?" "안 마쳤어?" 나는 선방한다. "마치려면 한참 멀었어. 기다리지 마."

이번엔 과외 보충 다녀온 둘째가 전화를 걸어온다. 아마 아내가 시켰을 것이다. 이를테면 측면 공격인 셈. "아빠, 키보드와 마우스 어디 있어요?" "엄마가 알아."

일 마치고 나는 아내에게 전화한다. "이제 마쳤어. 지금 갈게."

아내는 코맹맹이 소리로 애교를 떤다. "빨리 와. 나 너무 심심하단 말이야."

"겸이는 뭐 해?"

"컴퓨터 오락하고 있어. 보고 싶어. 그러니 걸어서 오지 말고 뛰어서 와."

닭살이다. 뛰어가진 않았지만 그래도 마음은 바빴다. 빠른 걸음으로 서둘러 집에 도착하자 거실에는 김남일처럼 생긴 진공청소기가 나와 있다. 퇴근한 것으로 경기가 끝난 게 아니었나? 전반전이 끝났을 뿐 이제부터 후반 시작이다.

"청소시키려고 빨리 오라고 한 거야?"

"그럼 젖 주려고 빨리 오라고 했을까."

속공이다. 역습이다. 아내는 수비가 좋고 공수전환이 빠르다. 평소에 사용하는 어휘의 열 배는 더 동원하고 적절한 비유를 빠르게 활용한다. 지금까지 나는 아내와 싸워 단 한 번도 이겨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전적은 전적이고 경기는 해봐야 하는 거 아닌가.

"청소한단 말 안 했잖아." "지금 하잖아." "미리 말하면 안 돼?" "안 될 거야 없지만 미리 하면 더 늦게 올 거잖아."

김상득 듀오 광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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