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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봐도 범인’이란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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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가영
이가영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가영 사회팀 차장

이가영 사회팀 차장

지난 21일 눈길 가는 대법원 판결 한 건이 나왔다. 몇년 전 ‘태양다방 여종업원 살인사건 범인 검거’라며 대대적으로 보도됐던 사건의 파기환송 결정이었다.

개요는 이렇다. 2002년 부산의 바닷가에서 20대 여성의 시신이 발견된다. 용의자를 찾지 못해 미제사건이 됐다. 살인사건 공소시효를 없앤 이른바 ‘태완이법’이 제정돼 2015년 재수사가 이뤄졌다. 2017년 용의자 양모씨가 경찰에 잡혔다. DNA 등 직접증거는 부족했지만 1, 2심은 모두 양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살인죄도 간접증거만으로 유죄를 인정할 수 있지만 과학법칙에 의해 뒷받침돼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대법원에 ‘피고인이 아닌 제3자가 진범’이란 진정이 접수된 만큼 추가 심리 여부를 검토하라”며 사건을 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이 대목에서 20여년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두 개의 사건이 떠올랐다. 1995년의 ‘치과의사 모녀 살해사건’과 ‘가수 김성재 사망사건’이다. 같은 해 발생한 두 사건은 검경이 지목한 범인의 무죄가 확정되는 결말도 같았다. 당시 피해자 주변이나 세간의 시선은 “기소된 이들이 범인임에 틀림없다”였지만 수사당국이 제출한 증거는 그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정희선 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장은 퇴임하며 “김성재 사망 사건이 가장 아쉽다”고 말했다. 무죄가 선고된 것이 아니라 진범 특정에 실패해 피해자들의 억울함을 달래지 못한 안타까움이었을 것이다.

21일 대법원의 판결에 따라 태양다방 사건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수사당국이 “누가 봐도 범인”이라며 양씨를 지목했지만 대법원은 ‘10명의 범인을 놓쳐도 1명의 억울한 이를 만들면 안 된다’는 대원칙을 따랐다. 95년의 사건들이 수사 당국의 증거 확보 능력을 발전시켰지만 발생과 용의자 검거 사이 15년이 걸린 이번 사건은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칼에 찔려 차가운 물속에 버려진 그녀의 한을 풀어주려면 진범을 밝혀야 한다는 전제엔 변함이 없다.

국민들이 원하는 ‘사법개혁’도 바로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재판만큼은 반드시 대법원 판단을 받겠다는 무리를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재판 당사자들은 자신의 마지막 희망을 법원에 건다. 그런 국민들에게 막말을 하거나 하염없이 재판을 지연시켜 억울함을 안겼을 법원이 그 상처를 어루만지는 게 바로 국민들이 원하는 사법개혁이다.

국민들에게는 생소한 사법행정권 남용 문제를 부각해 법원 전체를 신뢰하지 못할 기관으로 몰아붙이거나 기존 법원의 적폐를 청산한다는 명목으로 주요 포스트의 인사를 교체하는 것, 적어도 그것이 국민이 원하는 사법개혁은 아니다.

이가영 사회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