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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하다]“일자리 자금 받아봐야 4대 보험 내면 본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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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미신청 근로자 추가 지원 관련, 일자리 안정자금 지원 제외 신청서’.

현실과 동떨어진 일자리 정책 #4대 보험에 가입해야 지원 대상 #형편 어려운 영세업주들은 외면 #“결국 4대 보험공단 안정자금”

지난달 말 서울 성북구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김지운(39)씨가 근로복지공단에서 받은 서류다. 김씨는 지난달 같이 일하는 직원 4명에 대한 일자리 안정자금 신청 서류를 제출했다. 40만원 정도 받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90여만원이 입금됐다. 곧 우편물로 지원 제외 신청서가 날아왔다.

예상보다 50여만원이 더 들어온 건 편의점에서 일하는 또 다른 직원 때문이었다. 신청도 안 했는데 공단이 알아서 챙겨준 것이다. 급여신고 내용을 통해 해당 직원이 9월부터 근무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곤 소급분까지 줬다. 김씨가 공단에 추가 서류를 내겠다고 했더니 공단은 “그럴 필요 없다”고 답했다고 한다. 김씨의 말이다.

“만약 자격 요건이 맞지 않으면 오는 18일까지 지원 제외 신청서를 제출하라고 했다. 그러면 다음 달 지급 예정인 지원금에서 환수하겠다는 거다. 자격에 맞지 않는다 해도 이미 받은 돈을 내놓겠다고 굳이 서류를 작성해 제출할 사업주가 있을까 싶다. 추가 서류도 필요 없다는 걸 보니 잘못 지급됐어도 환수할 의지가 없어 보인다. 국가 예산이 이렇게 허술하게 쓰여도 되나 싶다.”

근로복지공단은 사업주가 신청하지 않은 직원에 대해서도 일자리 안정자금을 우선 지급하면서 해당 직원이 요건에 맞지 않으면 환수 신청하라는 내용의 서류를 보냈다.

근로복지공단은 사업주가 신청하지 않은 직원에 대해서도 일자리 안정자금을 우선 지급하면서 해당 직원이 요건에 맞지 않으면 환수 신청하라는 내용의 서류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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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구에서 직원 27명인 광고회사를 운영하는 이모(42)씨는 반대의 경우였다. 연초에 일자리 안정자금을 신청하라는 서류를 한 번 받고 잊고 있었는데 9월 이후 연락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11월부터는 일주일에 한 번꼴로 일자리 안정자금을 신청하라는 서류가 날아들었고 경리 담당 직원뿐 아니라 이씨의 휴대전화로도 전화가 왔다. 이씨는 “귀찮기도 하고 직원들 애쓰는 게 안됐기도 해서 신청하려고 노무사에게 문의하니 정작 대상자가 한 명도 없다고 해서 어이가 없었다”고 말했다.

정부가 일자리 지원 심사원까지 동원해 안정자금 집행을 독려하고 무리하게 지원한 이유는 뭘까. 역설적으로 안정자금 지원이 현장과 괴리돼 있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 인근에서 한식당인 '왕벌'을 운영하는 이근재 사장은 "일자리 안정자금이 취약 계층을 돕기 위한 지원금이라고 하지만 정작 영세한 고용주에게도, 근로자에게도 별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최승식 기자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 인근에서 한식당인 '왕벌'을 운영하는 이근재 사장은 "일자리 안정자금이 취약 계층을 돕기 위한 지원금이라고 하지만 정작 영세한 고용주에게도, 근로자에게도 별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최승식 기자

우선 지원 기준과 관련이 있다. 안정자금의 지원 대상(지난해 기준)이 되려면 4대 보험(국민연금, 건강·고용·산재보험) 가입자 중 월 급여가 190만원을 넘지 않는 근로자여야 한다. 서울 종로구에서 한식당을 운영하는 이근재(54)씨는 “소상공인이나 영세 중소기업 대부분이 단기 근로자가 많아 4대 보험 가입률이 낮은데 안정자금을 받기 위해서는 사업주도, 근로자도 4대 보험료를 내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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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보험에 가입하면 근로자 월급의 18%에 해당하는 보험료를 매월 내야 한다. 보험료는 근로자와 고용주가 각각 절반씩 납부한다. 예컨대 월급이 150만원이라면 근로자와 고용주가 각각 13만원씩 낸다. 고용주 입장에선 일자리 안정자금(최대 월 13만원)을 받아 고스란히 4대 보험료를 내는 셈이다. ‘생색만 내고 줬다 뺏는다’ ‘일자리 안정자금이 아니라 4대 보험 공단 안정자금이다’라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보험료가 부담스러운 근로자는 오히려 안정자금을 꺼린다. 서울 의정부에서 편의점을 하는 계상혁(48)씨는 직원 8명 중 4명에 대해서만 안정자금을 받고 있다. 나머지 직원들이 4대 보험 가입을 꺼려서다. 계씨는 “한 달에 100만원 버는 ‘알바’ 입장에선 4대 보험료로 9만원을 내려면 큰 부담”이라고 말했다.

한식당을 운영하는 이근재 사장은 최저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 등으로 인건비 부담이 커지자 직원을 2명 줄이고 주방과 홀을 오가며 오전 7시 30분부터 오후 10시까지 일하고 있다. 최승식 기자

한식당을 운영하는 이근재 사장은 최저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 등으로 인건비 부담이 커지자 직원을 2명 줄이고 주방과 홀을 오가며 오전 7시 30분부터 오후 10시까지 일하고 있다. 최승식 기자

신청·지원 대상 불일치 문제도 있다. 아파트 경비 용역 업체를 운영하는 A씨는 올해 안정자금을 신청하지 않을 생각이다. 지난해 복잡한 서류작업을 거쳐 신청했지만 정작 지원금은 해당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에 지급됐다.

A씨는 “입주자대표회의와 계약을 할 때 인건비를 비롯해 장비 비용 등이 포함된 도급비를 책정하고 이 도급비를 받아 경비원에게 월급을 지급하는 구조”라며 “그런데 귀찮은 행정처리는 업체에서 하고 정작 지원금은 입주자대표회의에서 받으니 실질적인 경비원 월급 인상에 무슨 도움이 되겠나”고 말했다.
탐사보도팀=김태윤·최현주·문현경 기자 pin2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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