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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는 놀이고 축제 … 맘껏 즐겨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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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극적인 무승부였다! 박지성의 동점골이 터지기 전까지 프랑스는 세계 최강다운 위엄과 축구 미학을 보여줬다. 조직력과 개인기가 조화를 이루고, 그 조화의 힘으로 경기를 지배했다. 우리 팀은 굴욕 그 자체였다. 박지성의 패스도, 이영표의 드리블도 거의 볼 수 없었다. 조재진만 전방에서 고립된 섬처럼 서성거렸다. 결국 설기현의 크로스가 조재진의 머리를 거쳐 골문으로 달려드는 박지성의 발끝에 걸렸다. 경기 막판, 단 한 번의 찬스가 골로 연결되었다. 대한민국은 이 경기 때문에 꼬박 밤을 새웠다.

지금 지구라는 푸른 별의 조도(照度)는 그 어느 때보다 밝다. 지구가 그토록 환하게 빛나는 것은 월드컵 축구 때문이다. 하루 내내 축구는 화제의 중심이다. 그러나 지구인이 다 축구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축구에 대한 사람들의 호와 불호는 분명하게 갈린다. 사람들은 축구를 너무 좋아하거나 너무 싫어한다. 열성적인 축구 팬들은 숱한 경기를 쫓아다니며 응원하고, 축구를 통해 인생의 쓴맛과 단맛을 경험한다.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과 운명마저 축구의 규범을 통해 보며, 축구의 우아한 품격과 심오한 깊이에 환호하고 미친다. 우리는 왜 축구에 미치고 열광하는 것일까?

축구는 그 본질에서 유희다. 어린 시절 공을 차며 우리는 인간이 중력의 세계에 속해 있다는 걸 배운다. 아울러 인간으로서 배워야 할 도덕과 의무가 정강이뼈와 대퇴골에 속해 있다는 것과, 변동과 불연속을 지배하려는 발의 역사가 그렇게 길다는 것을 축구를 통해 배운다. 공을 차는 능력은 태어날 때부터 우리 안에 각인된 놀이 본능과 거부할 수 없는 생명 충동에서 나온다.

축구를 좋아하는 것은 본능이고, 싫어하는 것은 이성이다.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축구는 신성하고 숭고한 그 무엇이다. 축구 황제 펠레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 축구는 빈민가의 소년이 심신의 균형이 잡힌 하나의 인격자로 성장하는 데 매우 가치 있고 유용한 운동이다. 그러나 축구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축구가 싫은 이유를 열 가지 이상 말할 수 있다. 어쨌든 이 세상은 축구를 좋아하는 '본능!'을 가진 사람과 축구를 싫어하는 '이성'을 가진 사람이 함께 살아가게 되어 있다.

초록 잔디 위로 둥근 달이 내려온다. 달의 항로를 좇는 추적자들은 고양이처럼 신경을 곤두세우고 그 우연의 궤적을 탐색하고, 매복하고, 노려본다. 항상 중요한 순간을 쥐고 있는 것은 우연의 신(神)이다. 기회들은 예기치 않은 방향에서 왔다가 거머쥐기 전에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 세상의 일들이 그처럼 예측불허이며, 많은 우연이 소용돌이치는 세계 속에 있다는 사실에 나는 전율한다.

누구나 헛발질을 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공을 비켜 간 발은 아무 보람도 없이 공중을 가르고, 공은 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 곳으로 떼구루루 굴러간다. 그 첫 번째 헛발질의 낭패감이라니! 헛발질, 내가 처음으로 겪은 실패의 경험, 그 헛된 에너지의 소모는 씁쓸하고 허무하다. 운동장은 넓고 그 위의 푸른 하늘은 드넓다. 실축을 하고 낙담해 운동장에 우두커니 서 있는 찰나에 우리는 미래의 인생 여정에서, 합목적성에서 벗어난 선택을 하고 가끔은 실패할 수도 있으리라는 예감에 사로잡힌다.

축구의 드리블.패스.슈팅은 공에 내재된 우연의 운명들을 필연의 궤적으로 바꿔놓는 기술들이다. 마침내 종료 휘슬이 길게 울린다. 우연을 필연으로 바꾼 연금술사들은 스물두 개의 그림자를 잔디밭 위에 새긴 채 걸어 나온다.

오, 누가 승패를 말하는가. 축구는 놀이고 축제다. 놀이와 축제는 즐기는 것이다. 그 즐거움으로 삶의 활력을 삼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우리 선수들은 스위스와의 일전을 통해 16강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이기면 좋다. 그러나 졌다고 낙담할 필요는 없다. 승리는 이 축제의 부산물이지 불가결한 조건은 아니다.

축구 자체를 즐기고 그 즐거움에 빠져 보라! 축구에서 순수한 즐거움을 빼버린다면 축구는 살육과 잔혹 행위가 배제된 전쟁, 생산이 없는 노동, 땀방울과 질주, 우연들의 날뜀, 극도의 육체적 소모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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