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행복한책읽기Review] '건국의 아버지들' 무엇을 고뇌했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4면

우리 헌법의 탄생
이영록 지음, 서해문집
199쪽, 6900원

2002년 한.일월드컵과 함께 거듭났던 말이 '대한민국'이다. 우리의 공식 국호, 그러나 너무 거창했을까. 잠시 저쪽에 밀쳐놓고 약칭 '한국'으로 대신해왔던 언어다. 그러다가 '대~한민국 짜작짜짝짝'이라는 응원구호와 함께 가슴을 뜨겁게 해주는 마법의 이름으로 변신했다. 여기서 퀴즈 하나. "월드컵 시즌에 다시 외쳐보는 대한민국은 과연 누구의 작명일까요?"

'우리 헌법의 탄생'에 따르면 대한민국이란 이름은 1948년 6월 제헌국회에서 극적으로 탄생했다. 현행 헌법도 그대로 계승한 것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된 건국헌법 제1조 제1항. 제헌국회 헌법기초위원회의 '건국의 아버지'들은 바로 이 대목에서 표결까지 가는 토론을 거듭했다. 함께 검토했던 고려공화국(7표).조선공화국(2표).한국(1표)을 제친 대한민국은 최다 득표(17표)와 함께 신생 공화국 이름으로 최종 확정됐다. "조선 왕조가 명나라의 제도를 적용하는 데 수십 년 내지 수백 년이 걸린 것에 비해, 현대 한국의 국회가 서구식 입헌민주주의 제도의 닻을 올리는 데는 겨우 몇 주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현대정치사의 고전 '소용돌이의 한국정치'(그레고리 헨더슨)는 분단 위기, 좌파와의 대결이라는 특수 상황 속에서 급하게 진행된 건국 과정을 이렇게 묘사했다. 다분히 냉소적이다. 48년 5.10 총선거로 구성된 제헌국회가 헌법안을 독회(讀會).심의과정을 거쳐 통과(7월12일)시키는 데는 불과 한 달 보름밖에 걸리지 않았으니까. 이후 수차례 개헌과정을 거치며 '장식 헌법''누더기 헌법'이라는 오명도 썼다. 무관심 속에 헌법을 방치해온 것은 현대사에 대한 냉소 심리 내지 자부심 부족이 겹쳤기 때문이리라.

'우리 헌법의 탄생'의 등장은 뜻밖이다. 따뜻한 시선으로 건국의 아버지들의 애국적 열정(56쪽)을 껴안으려 한 자세, 건국 헌법 자체를 "(현대사의) 가장 자랑스러운 문서 중의 하나"로 규정하면서 제헌 과정의 드라마를 추적한 노력 때문이다. 독서시장 측면에서도 더없이 반가운 법률교양서지만, 이 책은 그 이상이다. '헌법으로 읽는 대한민국 건국사'라는 부제대로 "(제헌사를 통해) 헌법 공동체로서 우리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역사적 문서의 탄생을 음미해보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그 첫걸음은 유산에 대한 공동체적 기억에 대한 끊임없는 해석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7쪽). "우리 제헌사를 반추하는 것은 처음에 잘못 끼워진 단추를 찾아내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그럼으로써 뒤틀린 부분까지도 포함하여 우리 헌법의 역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8쪽).

즉 제헌 과정에서 시간에 쫓겨 정파 사이에 황급한 '동상이몽의 타협'을 했던 대목 같은 것은 비판적으로 접근을 한다.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민주공화국을 선언한 건국헌법의 제1조 1항부터 '헌법적 결단'에 속한다. 세습군주제의 고리를 미련없이 잘라냈던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사실 해방 3년(1945~48)기간에 좌파는 물론 우파까지 왕조 부활론을 제기한 바 없었다. 서구 역사에서 그 흔한 군주파.공화파 갈등은 흔적조차 없었다. 그만큼 국민 사이에 시대정신을 공유했다는 증거라고 말하면 지나칠까?

핸더슨은 "몇 주일 만에 입헌민주주의?"라고 혀를 찼지만, 그건 '다이내믹 코리아'의 전주곡이었는지도 모른다. 저자는 "우리 헌법의 제정은 입헌주의의 불안한, 아니 매우 결함 많은 출발이지만, 확실히 출발은 출발이었다"(193쪽)라며 현대사를 긍정하는 쪽이다. 사실 공화정에 대한 명문조항은 수십년 전에 제정된 상해 임시정부의 헌법전(8장 57개조)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건국 헌법은 느닷없이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갖출 것을 갖춘 근대 성문헌법"인 임정 헌법전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헌법은 "정치와 법의 경계선에 있는 법". 때문에 이 책을 보면 건국헌법이야말로 '현대사의 거대한 자궁'임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신생국가의 성격과 이념은 물론 정부형태.권력구조까지 우리의 거의 모든 정치 유산은 여기에 바탕을 둔다. 좌파가 내세운 인민민주주의 대신 자유민주주의를 선언한 점, 권력 구조에서는 한민당 계열의 내각책임제 대신 이승만이 내세운 대통령제를 채택한 점도 그렇다.

저자 이영록(조선대.41)교수는 서울대 법대 출신. 본래 서양법철학을 공부했으나 "이제는 우리 것을 연구할 때"라는 인식 아래 유진오의 헌법사상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인문학 바다의 외딴 섬"으로 남아 있던 법학 분야에서 등장한 이 대중 교양서는 이념적으로는 엄정 중립이다. 그러나 현대사를 보는 시선이 따뜻하다는 점에서는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쪽에 가깝다. 문장 역시 나무랄 바 없다.

조우석 문화전문기자

헌법 기초 주인공은 누구 유진오 혼자 ? 공동 작업 ?

해방 직후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 망명생활을 마치고 귀국할 때의 일이다. 그는 프린스턴대의 헌법학자 슬라이 박사에게 "나중에 내가 요청하면 헌법을 하나 기초해달라"고 주문했다. 식민지 36년 동안 국가 구상의 틀을 짜는 훈련을 받은 학자 자체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해냈다. 상해 임정의 헌법전이란 유산도 없지 않았고, 나중에 '헌법 기초의 주역'으로 불리게 되는 현민(玄民) 유진오도 깜짝 발탁됐다.

당시 현민은 40대 초반. 원로급인 제헌의원들에 비하면 젊은 나이였다. 경성제대를 수석 합격한 이 수재를 발탁한 것은 미군정 사법부 산하의 법전기초위원회. 기초위 내부의 한 분과로 헌법분과위원회가 만들어졌고, 현민은 위원으로 위촉받은 것이다. 헌법분과위원장은 가인(街人) 김병로였다. 훗날 초대 대법원장으로 이승만에 맞서 사법부 독립을 옹호했던 인물이 그였다.

헌법분과위원회는 효율적인 회의 진행을 위해 소장 헌법학자 현민에게 헌법의 전체 초안을 주문했다. 그런 내력이 현민이 헌법 기초의 주역이란 훗날의 평가로 이어진 배경이다. 어쨌거나 '우리 헌법의 탄생'의 저자는 그가 본격적으로 헌법을 공부한 것은 불과 3년이라고 지적했다. 놀라운 점은 그런 소장학자가 기초한 건국헌법이 훌륭했다는 점이다. 또 건국헌법안의 내용과 표현에서 압도적으로 그의 흔적을 반영하고 있다. 특히 평가할 대목은 문투, 즉 당시로서는 매우 세련된 문장 스타일의 도입이다.

그러나 현민만이 아니다. 헌법 제정은 집단적 노력의 산물이기도 했다. 친일이라는 낙인에서 벗어난 몇 안 되는 법조인, 이후 정부 수립 뒤 초대 검찰총장을 지냈던 권승렬이 만든 초안도 현민의 초안과 함께 제헌과정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런 점에서도 건국헌법은 현대사의 공동유산인 셈이다. 단, 외국의 근대 시민헌법들과는 크게 다르다.

즉 프랑스 헌법, 미국헌법은 근대혁명을 성공시킨 시민계급의 이상을 표현한 법문서였다. 반면 프로이센 헌법은 당시는 미약했던 신흥 시민계급과 군주 사이의 어정쩡한 타협의 산물. 즉 헌법이란 그 시대 주도세력이 그리는 시대정신을 총체적으로 구현한 것인데 비해 우리는 좌.우파 갈등과 분단 위기 속에서 황급하게 제정됐다는 성격을 갖고 있다.

그래서일까? 우리 헌법은 이후 기본적인 틀이 여러 번 흔들려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미국헌법이 1787년 제정 이래 몇 차례 수정조항 추가 외에는 기본 틀을 그대로 유지하는 점, 일본 헌법이 이른바 평화조항 수정 시비에도 불구하고 단 한 차례의 개헌이 없었던 것과도 대조적이다. 이런 짭짤한 배경지식을 담은 '우리 헌법의 탄생'을 각별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다른 헌법 관련 책은 …

헌법 관련서는 생각 보다 많다. 당장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키워드 '헌법'을 쳐보라. 김두식의 '헌법의 풍경'(교양인, 2004), 한상범의 '우리 헌법 이야기'(삼인, 2005), 정중섭의 '대한민국 헌법을 읽자'(일빛, 2002), 박홍규의 '그들이 헌법을 죽였다'(개마고원, 2001)등이 주르르 뜬다. 물론 '헌법 총론''헌법학 개론'같은 '한국적인, 너무도 한국적인' 수험서 류(流)는 논외로 치자. 이들 헌번 관련 책 중에서 학문적 엄밀성을 전제로 한 교양서는 드물다.

따라서 인문학으로서의 법학에 근접한 양서를 꼽으라면 '대한민국 헌법을 읽자'와 '우리 헌법 이야기'정도가 전부다. 특히'우리 헌법 이야기'는 서구 근대시민 헌법의 사례와 우리 헌법을 비교하며 '인간의 얼굴을 한 헌법'이야기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허전한 구석이 없지 않다. 즉 막상 제헌사를 촘촘하게 들여다봤다고는 하기는 어렵다. 이 허전함을 채워준 신간이 '우리 헌법의 탄생'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