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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아닌 시」불티나게 팔린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대중가요 가사와 대학가의 낙서가 시 부문 베스트셀러 1,2위를 차지하고 있다. 종로서적이 최근 집계한 시 부문 베스트 셀러 목록에 따르면 지난 3일부터 작사가 김미보씨가 쓴 『편지』(소담 출판사 간)가 1위, 대학가 주변에서 주운 낙서 모음집 『슬픈 우리 젊은 날』(오늘 간)이 2위를 차지하는 등「시 아닌 시」들이 대형서점 집계 베스트셀러 수위를 차지하고 있어 문단에 충격을 던져준다.
『사람과 헤어지는 슬픔을 잊기란/그다지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그때,/그 거리, 그 찻집에서 흐르던 노래와/그때 걸치던 옷자락에 스며든/추억을 잊는다는 것이/정녕/이별의 아픔이라네/잊어야지 하는 것이/모순이라면/잊혀지겠지 하는 것은/진정일텐데』(『편지』중「안개빛 사랑」일부)
인용 부분과 같이 『편지』는 지은이의 말처럼 『노래로 발표된 가사들이 대부분으로 정형조의 음률에 약간의 수정을 한시도 아니고, 그렇다고 노래도 아닌, 그저 편지의 한 부분들』로 이루어졌다. 비유·상징·이미지 등 시적 기법에 의한 형식미는 물론 이러한 기법을 바탕으로 얻어낼 수 있는 시적 긴장과 서정도 없다.
그저 젊은 층을 대상으로 한, 어두운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DJ 멘트나 심야방송 낭송에나 딱 들어맞을 표피적 감상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1차적 감상을 위한 글들로 엮어진 『편지』가 지난 2월1일 초판을 찍어낸 이래 석 달도 채 못 돼 3만5천부가 팔려나갔다. 주 독자층은 여고생이나 직장여성들. 『선거가 며칠 안 남은 이날,/나는 한 개의 떡볶이와/한 모금의 맥주에/슬픈 나 자신을 묻어버린다./오늘의 나/그리고 슬프다.』『늪을 지키고 선 수양버들에게는/저마다 하나씌./슬픈 이야기가 있다./사람들 또한 제각기/슬픈 사연들을 지니고/이룰 수 없는 꿈들을 삭이며 하루를 사른다.』(이상 『슬픈 우리 젊은 날』중에서)
『슬픈 우리 젊은 날』은 대학 주변의 카페·술집·레스토랑·교내서클룸·대자보, 심지어는 화장실 등에서 모아온 낙서를 선별해 엮은 책이다. 위 인용부분에서 볼 수 있듯 기성의 유명시를 빌어 심경을 가볍게 토로하거나 술 마시다 문득 떠오른 감상들을 끄적거린, 말장난들이 대부분인 문자그대로「낙서」들이다.
대학생들의 낙서라면 무릇 낭만이나 실존에 대한 짙은 고뇌, 혹은 진보적·역사의식 등이 배어있을 법도 한데 여기에 실린 낙서들 대부분은 일상사에 대한 감상과 말장난으로 일관하고 있다.
『슬픈 우리 젊은 날』은 작년 8월 출간된 이래 20만 부 이상이 팔려나갔고 이런 추세라면 금년내로 50만 부를 돌파할 것 같다.
80년대 들어와 이해인 수녀의 시 『민들레의 영토』,도종환씨의 시 『접시꽃 당신』, 서정윤씨의『홀로 서기』 등 감상적 서정시가 소설을 누르고 베스트셀러가 되더니 드디어는 대중가요가사나 낙서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시단에서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허망감과 함께 자성의 소리도 높다.
80년대 들어 실험시·민중시 등의 확산으로 기존 시에 대한 형태파괴나 목청 돋우는 데로 나가다보니 시에 대한 개념상의 혼란을 일으켜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독자들이 극단적 감상에 빠져들고 있다는 게 시인 정진규씨 (『현대시학』주간)의 지적이다.
때문에 이제는 우리의 시도 인간의 보편적 정서를 다룬 서정성을 중시하는 데로 회귀해야된다는 것이 정씨의 주장이다.
한편 베스트 셀러의 독자층이 주로 문학적 수용능력이 부족한 젊은이들이기 때문에 이들이 올바로 시집을 선택할 수 있게 하는 정보 및 교육이 시급하다는 지적도 있다. 넘치는 감상성을 지성을 통해 맑은 서정으로 승화시키지 못하고 그대로 내밸어버린 80년대의 베스트셀러 시집들은 독자들을 감상주의에 빠뜨리는 또 하나의 「퇴폐문화」에 다름아니라는 지적도 있는 만큼 대책이 시급하다.
우선은 학교에서 지금의 문제풀이식 시 교육이 아니라 감상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는 교육과 출판사·서적·평론가·언론 등 문학작품 관리층들의 올바른 정보제공이 필요하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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