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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란 껍질에 날짜 못 찍어"···식약처 정문 부순 양계농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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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추적]  

대한양계협회 등 양계농민들이 지난달 13일 충북 청주시 오송읍 식품의약품안전처 앞에서 산란 일자 표기 반대 집회를 열고 있다. [뉴스1]

대한양계협회 등 양계농민들이 지난달 13일 충북 청주시 오송읍 식품의약품안전처 앞에서 산란 일자 표기 반대 집회를 열고 있다. [뉴스1]

들끓는 농심…식약처 정문 파손

지난달 13일 충북 청주시 오송읍 식품의약품안전처 앞. ‘계란 산란일자 표기 반대집회’에 참가한 농민 1500여 명이 “식량주권 앗아가는 산란일자 표기를 즉각 철회하라”고 외쳤다.

양계농들, “계란 산란일자 철회” 반발 #“살충제 파동 책임 농민에 떠넘긴다” #정부, “국민위생 차원 제도시행부터”

이들은 ‘계란 농가 말살하는 탁상행정 중단’과 ‘축산물 안전관리 농식품부 이관’ 등을 촉구하며 식약처 정문을 밀어 넘어뜨렸다. 대한양계협회 이홍재 회장은 “계란의 신선도는 산란일이 아니라 보관온도나 유통 과정에 달렸는데, 유독 우리나라만 산란일자 표기를 강요하려 한다”고 말했다.

2017년 살충제 계란 파동으로 촉발된 계란의 생산표시 개선이 난항을 겪고 있다. 올해 계란 산란 일자 표기와 식용란 선별포장 시행일이 다가오면서 양계농가의 반발이 커지고 있어서다. 농가들은 “현행 계란 유통시스템부터 바꾸지 않으면 막대한 시설비와 대규모 계란 폐기에 대한 부담을 농가가 져야 한다”고 반발하고 있다.

전북 김제의 양계농민들이 계란 산란일자 표기와 식용란선별포장업 시행을 앞두고 불안감을 호소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전북 김제의 양계농민들이 계란 산란일자 표기와 식용란선별포장업 시행을 앞두고 불안감을 호소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계란 표기 바꾼 ‘살충제 계란 파동’

계란 표기를 둘러싼 논란은 ‘살충제 계란’에서 비롯됐다. 식약처는 2017년 9월 살충제 사건이 나자 새로운 계란 껍데기의 표기 방식을 내놓았다. 농장별로 부여되는 ‘생산자 고유번호’(5자리)와 닭을 사육하는 축사형태인 ‘사육환경번호’(1자리)를 계란마다 찍도록 한 게 골자다. “지난해 4월 도입된 새 난각 코드는 기존의 ‘시도별 부호’(2자리)와 ‘농장명’(2자리) 표시보다 추적·관리가 쉽다”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정부는 이후 올해 2월 23일부터는 6자리 형식의 새 코드에 산란 일자(4자리)를 추가로 표기하도록 고시했다. 우유나 육류 가공식품에 제조 일자를 매기듯 닭이 알을 낳은 날짜를 직접 표기하도록 한 것이다.

양계농가들은 반발했다. “계란에 날짜를 찍으려면 새로 기계를 구입해야 하는데다 날짜가 찍히면 유통과정에서 자칫 멀쩡한 계란까지 폐기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계란 유통업계에 따르면 현행 포장일을 기준으로 한 계란의 유통기간은 냉장 35일, 실온 30일 정도다. 산지에서 생산된 계란이 중간 수집판매인의 손을 거쳐 대형마트나 상점에 납품되는 시간을 감안해 만든 기한이다. 통상 계란은 AI가 발생할 때나 명절 연휴 등을 제외하더라도 가게에 진열되기까지 3~5일이 소요된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전북 김제의 양계농민들이 계란 산란일자 표기와 식용란선별포장업 시행을 앞두고 창고에 보관 중인 계란을 바라보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전북 김제의 양계농민들이 계란 산란일자 표기와 식용란선별포장업 시행을 앞두고 창고에 보관 중인 계란을 바라보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농가들 “계란 선도, 보관·유통이 결정”

농민들은 “산란 일자 표기는 계란 유통의 특성을 전혀 모르는 정책”이라는 반응이다. 소비자의 입장에선 유통기한 여부를 떠나 나중에 낳은 계란을 무조건 나쁜 계란으로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일부 농가들 사이에선 “살충제 남용을 막는다면서 날짜를 찍어야 하는 이유가 뭐냐”는 불만도 나온다.

전북 김제에서 양계농가를 하는 박운이(59)씨는 “계란은 냉장보관만 잘하면 두 달이 지나도 노른자가 퍼지지 않고 신선하다”며 “먹을 수 있는 계란을 폐기할 경우 어디에서 보상을 받느냐”고 말했다.

농가들은 오는 4월 25일 시행될 ‘식용란선별포장제’를 놓고도 난색을 보인다. 이때부터 가정용 계란은 반드시 식용란선별포장업 허가를 받은 곳을 거쳐야만 판매가 가능해져서다. 선별포장이란 식용란을 전문적으로 선별·세척·건조·살균·검란·포장하는 일이다. 식품안전관리인증기준(해썹·HACCP)이 의무 적용되는 선별포장업 허가는 시·도지사가 한다.

지난달 13일 청주시 오송읍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열린 '계란 산란일자 표기 반대 집회' 참가자들이 식약처 정문을 밀어 넘어뜨리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13일 청주시 오송읍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열린 '계란 산란일자 표기 반대 집회' 참가자들이 식약처 정문을 밀어 넘어뜨리고 있다. [연합뉴스]

가정용 계란 포장업소 전국 20곳뿐

업계에서는 현행 계란의 포장·유통과정과 처리 규모를 고려할 때 제도 시행이 시기상조라는 분위기다. 이날 현재까지 식용란 선별포장업 허가를 받은 업소가 전국적으로 20곳에 불과해서다. 매일 전국에서 유통되는 계란이 4200여만개라는 점에서 1곳당 평균 210만여개의 계란을 처리해야 하는 셈이다.

이 때문에 농가들 사이에선 계란 대란이나 불법적인 계란판매가 이뤄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계란 유통센터가 전국 광역지자체당 1곳꼴이라는 점에서 계란 수급을 맞추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농민 최성기(50)씨는 “선별포장업 허가를 받으려면 5억원 이상의 시설비가 든다”며 “현재 허가를 받은 곳은 대기업 유통업체나 대농들뿐인데 결국 소규모 농가는 폐업하거나 큰 농가에 흡수될 처지”라고 말했다.

전북 김제에서 양계농가를 하는 박운이씨가 계란 산란일자 표기와 식용란선별포장업 시행을 앞두고 불안감을 호소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전북 김제에서 양계농가를 하는 박운이씨가 계란 산란일자 표기와 식용란선별포장업 시행을 앞두고 불안감을 호소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시스템부터 확충 vs 양계업계 체질 바꿔야 

상당수 전문가 역시 계란의 유통 특성을 살린 시스템을 먼저 갖출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농협이나 정부가 운영하는 전국 단위의 계란 유통센터나 냉장보관 기준 등을 만든 뒤 현장에 적용하자는 주장이다. 김호 단국대 환경자원경제학과 교수는 “정부의 취지에는 대부분의 농가가 공감하는 만큼 기반 시설이나 유통 시스템부터 확충한 뒤 시행해도 늦지 않다”고 말했다.

반면 일부에서는 “제도의 선 시행을 통해 양계업계의 체질부터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양계농가들의 규모화·체계화를 통해 보관 및 유통 과정의 투명성을 높여야만 살충제 파동 같은 사고가 반복되지 않는다는 견해다.

주무부처인 식약처는 일단 제도를 시행한 뒤 문제점을 개선해 간다는 방침이다. 계란이 국민 식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제도적인 정착이 급선무라는 판단이다. 식약처는 제도 시행을 앞두고 농가 보조금 지원이나 가정용 외 계란 가공식품 판로 확보 등의 방안을 마련 중이다.

전북 김제의 양계농가에서 생산된 계란. 프리랜서 장정필

전북 김제의 양계농가에서 생산된 계란. 프리랜서 장정필

정부, 제도 시행 후 문제 개선 입장 

아울러 정부는 계란 선별 포장센터 허가를 받은 20곳 외에도 전국 중소형 포장업소 70~80곳을 활용하는 안을 검토하고 있다. 최근 농가의 반발이 큰 산란 일자 표기는 6개월간 계도기간을 주기로 했다. 식약처 관계자는 “오는 8월까지는 농가에 대한 단속이나 행정처분 대신 계도와 홍보를 통해 제도를 조기에 정착시키겠다”고 말했다.

김제=최경호 기자 choi.kyeong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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