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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 '경영상 위기' 들어 통상임금 지급 소급 거부하는 회사에 제동

중앙일보

입력

“기업의 당기순이익이 높고 소급 지불해야 하는 임금이 그와 비교해 월등히 적다면, 근로자들에게 소급 임금을 지불해도 ‘경영상 위험’은 없다는 판단이 나온거죠.”(근로자측 변호인)

대법, "다스 근로자에게 통상임금 소급해 지급해야" #근로자 "회사 재무 지표 좋으면 경영 위기 없다는 것" #재계 “기업 체력을 ‘수치’로만 판단할 수 있나” 반발

27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금속노조 다스지회 노조원들이 통상임금 소급효 사건 상고심 선고를 마친 후 법정을 나서고 있다. [뉴스1]

27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금속노조 다스지회 노조원들이 통상임금 소급효 사건 상고심 선고를 마친 후 법정을 나서고 있다. [뉴스1]

대법원 3부(주심 조희대 대법관)는 27일 자동차 부품업체 다스 근로자 곽모씨 등 30명이 회사를 상대로 “새로운 통상임금 기준에 따라 추가 임금을 소급해 지급하라”며 제기한 통상임금 지급 소송에서 최종적으로 근로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근로자 측에서 소송을 대리한 김상은 변호사는 “대법원이 당기순이익 등 명확히 확인할 수 있는 지표들을 근거로 기업들의 임금 지급 능력을 평가한 것”이라며 “그 기준에 따라 근로자들이 요구하는 소급 임금을 지급하더라도 기업이 경영 위기에 빠지지 않아 ‘신의성실의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판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판결의 쟁점은 김 변호사가 언급한 ‘신의성실의 원칙’을 판단할 기준이 무엇인지 여부였다. 2013년 대법원은 정기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포함된다는 판결을 하며 “(근로자들이 새로운 기준에 따라 미지급된 임금을) 소급 청구할 수 있지만, 신의성실의 원칙에 따라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신의성실의 원칙은 ‘상대방의 이익을 침해하거나, 신뢰를 저버리는 방법으로 권리를 행사하거나 의무를 이행하면 안 된다’는 규범이다. 통상임금 소송에서는 근로자의 요구액이 지나치게 커서 회사의 존립이 위협받거나 심각한 경영의 위기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을 경우 ‘신의성실의 원칙을 위반한 권리 남용’이 된다. 이 경우 사측은 근로자가 요구하는 임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

1·2심은 "이 사건 청구로 회사에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재정적 부담을 지워 중대한 경영상의 어려움을 초래하거나 기업의 존립이 위태롭게 돼 신의성실의 원칙을 우선해 적용하는 것을 수긍할 만한 특별한 사정이 있다고는 보기 어렵다"며 근로자 측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대법원도 원심 판단을 그대로 인정했다.

대법원은 이날 판결이 ‘기업의 경영 능력’ 기준을 설정한 것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대법원 측은 “원심 판결에 오류가 없음을 재확인했을 뿐”이라며 “새로운 법리나 기준을 판시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1·2심은 물론 대법원에서도 첨예하게 다뤄졌던 부분이 ‘기업의 경영 능력을 무엇을 통해 판단할 수 있나’였던 만큼 대법원이 근로자 측이 제시한 기준에 손을 들어줬다는 해석이 나온다. 근로자 측은 “당기순이익이 높은 만큼 기업이 근로자에게 임금을 지급해도 경영상 위기에 빠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12월 1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양재동 현대자동차 본사 주변에서 열린 현대제철 비정규직 결의대회 모습. [뉴스1]

지난해 12월 1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양재동 현대자동차 본사 주변에서 열린 현대제철 비정규직 결의대회 모습. [뉴스1]

김상은 변호사는 “대법원이 이번 판결을 통해 다수의 하급심 법원과 마찬가지로 기업의 지급 능력을 구체적으로 정한 것”이라며 “연구개발이나 설비 투자 등 추상적인 기업의 영업활동이나 미래 비용 등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고, 당기순이익 등 구체적으로 드러난 기준을 기업 능력으로 본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재계 등 일각에서는 ‘수치’로만 기업의 체력을 평가하는 게 문제가 많다는 지적이 나온다. 재계 관계자는 “당기순이익이 좋다고 해서 당장 그 기업이 비용을 많이 부담해도 위기에 빠지지 않는다는 게 아니다”며 “설비 투자나 기술개발 등 미래에 발생할 비용을 고려하면 소급 적용하는 통상임금을 무조건 다 지급할 경우 경영상 어려움에 빠질 수 있다”고 말했다.

재계 소송을 주로 담당한 한 변호사도 “사내유보금이나 경영수지 등 회계 지표상 숫자로 기업을 판단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며 “이번 판결로 산업계 전체의 인건비 부담이 늘어나면서 기업 활동에 악영향을 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스 근로자들의 소송과 달리 1·2심에서 신의성실의 원칙 적용 판단이 엇갈려 더 주목됐던 보쉬전장 근로자들의 소송은 대전고법으로 돌려보내졌다.

대법원 관계자는 "대법원이 지난 6월 ‘근로기준법상 1주 40시간을 초과해 이뤄진 휴일근로는 연장근로에 해당하지 않으므로 휴일 근로에 따른 가산임금 외에 연장근로에 따른 가산임금을 중복해 지급할 것은 아니다’는 취지로 선고한 전원합의체 판결과 배치되는 부분이 있어 사건을 파기 환송했다"며 “이 부분보다 판단순서가 뒤인 '신의성실의 원칙 주장‘에 관해서는 대법원이 판단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후연 기자 lee.hoo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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