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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했던 붉은악마는 어디에…" 응원전 시민의식 아쉽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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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월드컵에서 토고에 역전승을 거두고 시민들이 승리감에 들떠있던 14일 오전 0시 30분.

서울 중구청 소속 환경미화원 구연만(47)씨는 지하철 을지로입구역 부근에서 동료 미화원 160여 명과 함께 빈 맥주캔과 응원용 도깨비 뿔, 휴지 등으로 뒤덮인 도로를 청소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쓰레기는 광화문과 청계천 주변에서 응원한 시민들이 귀가하면서 마구 버린 것들이다.

당초 미화원들은 구역을 나눠 청소하려고 했다. 그러나 쓰레기가 예상밖으로 많아 을지로 쪽에서 광화문 쪽으로 밀어내는 '작전'을 펼쳐 오전 5시쯤 간신히 청소를 마무리 했다. 쓰레기 압축차량 11대 등 장비를 동원한 끝에 수거된 쓰레기는 100t. 구씨는 "2002년 월드컵 때는 시민들이 쓰레기를 집으로 가져가거나 한곳에 모아 놓았는데 이제는 다른 나라 이야기처럼 여겨진다"고 말했다.

같은 시간 시청 앞 4000여평의 서울광장에서는 용역직원 80여 명과 한국환경자원공사의 축구동호회 회원 40여명으로 구성된 '자원순환 특공대'가 청소에 나서 80t의 쓰레기를 모았다.

환경미화원 김상열(62)씨는 "지하철 시청역 구내에서만 100ℓ짜리 봉투 26개 분량의 쓰레기가 나왔다"며 "평소보다 7배 정도 많았다"고 말했다. 이밖에 7만여명이 모인 상암동 서울월드컵경기장과 2만여명이 '대 ̄한민국'을 외친 잠실야구장도 쓰레기장을 방불케했다. 상암경기장 곳곳에는 태극기가 바닥에 나뒹굴기도 했다.

응원을 빙자한 무질서도 난무했다. 신촌역.광화문을 비롯한 시내 곳곳에는 폭주족들이 질주했고 상암경기장 주변에는 역주행 하는 폭주족까지 있었다. 경기가 끝난 뒤 일부 흥분한 시민들은 도로로 뛰어들었고 정지 중인 버스나 승용차의 본네트에 뛰어올라 응원구호를 외쳤다.

직장인 정성호(32)씨는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 부근에서 교통 체증으로 정차해 있는 사이 사람들이 내 차에 뛰어올라 구호를 외쳤다"며 "한국팀의 승리로 좋았던 기분을 완전히 망쳤다"고 말했다. 종로구 관철동에서는 거리응원단이 터뜨린 폭죽의 불꽃이 공사중인 상가건물의 방진막에 옮겨 붙어 건물 외벽 일부를 태웠다.

이처럼 한국팀이 경기에서는 승리했지만 시민의식은 오히려 뒷걸음질쳤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4년 전 월드컵 때 처럼 경기가 끝난 뒤 응원객들이 자발적으로 청소하고 질서정연하게 귀가하는 모습을 되살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서울광장의 관리를 맡고 있는 서울시 권혁우 팀장은 "쓰레기를 치우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낸 세금이 사용되는 만큼 자신이 머문 자리를 깨끗이 정리하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아쉽다"고 말했다.

<이수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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