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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째 크리스마스 선물…장흥에는 ‘산타’가 산다

중앙일보

입력

오는 25일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전남 장흥과 전북 정읍 지역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는 엘디마트 안정남 대표. 프리랜서 장정필

오는 25일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전남 장흥과 전북 정읍 지역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는 엘디마트 안정남 대표. 프리랜서 장정필

매년 크리스마스이브에 선물을 나눠주는 산타클로스처럼 전남 장흥 지역 아이들이 성탄절에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아이들을 위해 매년 두 차례, 잊지 않고 선물을 주는 ‘장흥의 산타 할아버지’ 안정남(75)씨다.

장흥읍 엘디마트 안정남 대표, 1999년부터 나눔 #어린이날 등 매년 두 차례 지역 아이들에게 선물 #2014년 정읍에 마트 2호점 문 연 뒤 나눔 확대 #"한 사람이라도 나눔 활동 동참한다면 보람"

장흥군 장흥읍에서 마트를 운영하는 안씨는 매년 크리스마스와 어린이날에 가게 앞에서 선물을 나눠준다. 그가 직원들과 함께 준비한 선물 꾸러미에는 과일부터 과자, 학용품까지 담겨 있다. 누군가에게는 흔할 수 있지만,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는 먹고 싶고 갖고 싶은 것들이다.

안씨가 지역 아이들에게 선물을 돌리기 시작한 것은 1999년이다. 원래 농기계 대리점만 하다가 ‘엘디마트’라는 상호로 중소형 규모의 상점 문을 연 무렵이다. 안씨는 “농기계 대리점 할 때부터 마을 곳곳을 돌아다녀서인지 어려운 이웃들이 눈에 들어왔다”며 “마트를 시작한 뒤에는 배고팠던 어린 시절이 떠올라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게 됐다”고 했다.

오는 25일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나눠주는 이벤트를 알리는 플래카드가 전북 정읍의 엘디마트에 내걸려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오는 25일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나눠주는 이벤트를 알리는 플래카드가 전북 정읍의 엘디마트에 내걸려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처음에는 ‘내가 가진 것을 조금씩이라도 나누자’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나눔의 즐거움을 느끼면서 규모는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한 번 행사 때 아이들과 형편이 어려운 이웃에게 줄 선물 꾸러미 3000개까지 준비하기도 했다. 금액으로 치면 5000만원 안팎이 들었다.

2014년에는 전북 정읍에도 마트 문을 열면서 이곳 아이들에게도 크리스마스와 어린이날에 선물을 주고 있다. 두 지역을 합쳐 약 5000개 선물 마련에 하루 약 1억원의 돈이 든다. 모두 안씨의 사재다.

안씨의 나눔 활동은 밥 한 끼 먹기도 어려웠던 어린 시절에서 비롯됐다. 9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안씨의 집은 말 그대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같은 시절 대다수 이웃이 그랬듯 물을 가득 넣은 죽을 동생들과 나눠 먹으며 굶주린 배를 채웠다. 안씨는 “초등학교 시절 어려운 형편에 도시락은 2학년 2학기가 돼서야 들고갈 수 있었다”고 했다.

연필 한 자루를 사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한 번은 어머니가 키우는 닭이 낳은 알을 팔아 겨우 연필을 사느라 학교에 지각했다. 그 사정을 모르는 선생님은 안씨를 크게 혼낸 뒤 벌을 세웠다. 이 일은 안씨가 아이들의 선물에 학용품을 빼지 않고 넣는 계기가 됐다.

오는 25일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전남 장흥과 전북 정읍 지역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는 엘디마트 안정남 대표. 프리랜서 장정필

오는 25일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전남 장흥과 전북 정읍 지역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는 엘디마트 안정남 대표. 프리랜서 장정필

안씨의 나눔 활동이 길어지면서 선물을 받았던 아이가 어른이 된 뒤 자녀와 함께 찾아오기도 한다. 아이들은 “말 안 들으면 크리스마스에 할아버지 마트 안 데려간다”는 부모 말에 고분고분해진다. 안씨는 “건강하게 잘 자란 아이들이 어느새 결혼하고 엄마ㆍ아빠가 돼 아들ㆍ딸 손을 잡고 오는 걸 보면 묘한 기분이 든다”고 했다.

안씨는 학교 무상급식이 자리를 잡기 전 형편이 어려워 급식비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아이들을 남몰래 지원하기도 했다. 아이들에게만 나눔을 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 농기계 대리점 3곳, 마트 2곳을 운영 중인 안씨는 장애인, 노인, 다문화가정 등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에게 수시로 먹거리를 나눠준다. 이웃들은 그의 마트를 이용해주며 감사의 뜻을 표현한다.

경기가 좋지 않아 수입이 줄면서 나눔 활동 중단을 고민한 적도 있다. 그러나 규모는 조금 줄이더라도 꾸준히 이어가기로 했다. 안씨는 “내가 엄청난 부자여서 선물을 나눠주는 것으로 아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빚도 적지 않다”며 “아이들이 기다릴 것이라는 생각에 쉽게 그만둘 수가 없다”고 했다.

남들에겐 아끼지 않을 정도로 인심이 넉넉하지만 자신에게는 엄격하다. 일주일에 몇 차례씩 직접 운전해 장흥과 정읍을 오가며 매장을 관리한다. 상품을 구매하러 화물차를 끌고 광주광역시를 찾는다. 식사시간을 놓쳐 라면으로 대충 끼니를 때울 때도 잦다. 안씨는 “나를 통해 주변에 한 사람이라도 나눔에 동참한다면 보람을 느낄 것 같다”며 “꼭 규모가 크지 않더라도 작은 나눔 활동을 시작해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장흥=김호 기자 kim.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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