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채인택의 글로벌 줌업] 백악관 잔디밭 '국가 성탄 트리'가 꺼진 그날

중앙일보

입력

채인택의 글로벌 줌업’ 외 더 많은 상품도 함께 구독해보세요.

도 함께 구독하시겠어요?

미국은 1923년 30대 캘빈 쿨리지(1872~1933년, 재임 1923~29년) 대통령 취임 첫해부터 백악관 남쪽 잔디밭에 '국가 성탄 트리'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매년 국가 성탄 트리 점등식에 대통령이 참석해 국민에게 화합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전통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올해도 지난 11월 28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참석해 점등식을 열었습니다. 국가 성탄 트리는 1973년부터는 살아있는 나무를 심어서 쓰고 있습니다. 폭풍 등으로 나무가 손상되면서 두 차례 교체해 지금 서있는 것은 3대째 생나무라고 합니다.

미 백악관 잔디밭 ‘국가 성탄 트리’ #1923년부터 전통이지만 꺼진 해도 #79년 이란 혁명으로 미 대사관 점거 #66명 인질 잡히자 국가 트리 불 꺼 #설치하되 기도용 별 하나 남기고 소등 #80년 성탄절 억류 417일 기억행사 #417초간 트리 전체 불 밝힌 뒤 꺼 #당시 트라우마 탓인지 이란에 앙금 #이듬해 1월 레이건 취임일 모두 석방 #내년 이란 이슬람 혁명 40주년 맞아

지난 11월 28일 백악관 잔디밭에서 열린 '국가 성탄 트리' 점등식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오른쪽)이 연설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 11월 28일 백악관 잔디밭에서 열린 '국가 성탄 트리' 점등식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오른쪽)이 연설하고 있다. [AP=연합뉴스

국가 성탄 트리는 매년 불을 밝히지만, 국가적인 불행이 있을 때는 이를 세우되, 불은 끈 적이 있습니다. 39대 지미 카터(94, 재임 1977~81년) 대통령 집권기인 1979년 당시 테헤란의 이란 주재 미국 대사관에 잡혀 있던 미국인 인질들을 생각하며 국가 성탄 트리의 불을 끄고 맨 위의 별 하나에만 불을 밝혔다고 합니다. 기도하는 심정을 나타낸 것이라고 합니다.

테헤란 미국 대사관 인질사건이 벌어졌던 1979년의 미국 국가 성탄 트리. 기도를 위해 맨 위의 별 하나만 남기고 모든 불을 껐다. [위키피디아]

테헤란 미국 대사관 인질사건이 벌어졌던 1979년의 미국 국가 성탄 트리. 기도를 위해 맨 위의 별 하나만 남기고 모든 불을 껐다. [위키피디아]

이란에선 1979년 1월 이슬람 혁명이 발생했습니다. 전국이 시위에 휩싸이자 전제정치를 펴던 샤(군주) 모하마드 팔라비(1919~80년, 재위 1941~79년)가 해외로 도주했습니다. 2월에는 종교지도자 아야툴라 호메이니(1900~89년, 라흐바르(최고지도자) 재임 1979~89년)가 망명지인 프랑스 파리에서 귀국해 과도 정부를 무너뜨리고 6월 신정체제의 이슬람 공화국을 출범했습니다.

1979년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에 이란 대학생들이 진입하고 있다. 444일에 걸친 인질극의 시작이다'. 오른쪽에 호메이니의 초상화가 보인다. [중앙포토]

1979년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에 이란 대학생들이 진입하고 있다. 444일에 걸친 인질극의 시작이다'. 오른쪽에 호메이니의 초상화가 보인다. [중앙포토]

이란은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국민이 뽑는 민주주의 체제를 갖추고 있지만 이슬람 시아파의 종교 지도자가 라흐바르(최고지도자)라는 자리를 맡아 세속 권력 위에 군림하는 체제를 지금도 유지하고 있습니다. 민주화 세력과 종교 세력이 힘을 합쳐 군주 체제를 무너뜨리면서 생긴 독특한 체제입니다. 서구에선 이를 '신정 체제'로 부릅니다.

1979년 테헤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태가 진행되는 동안 미국에서 반 이란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이란과 미국의 상호 악감정은 이후 40년째 계속되고 있다. [위키피디아]

1979년 테헤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태가 진행되는 동안 미국에서 반 이란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이란과 미국의 상호 악감정은 이후 40년째 계속되고 있다. [위키피디아]

그런데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이란 청년들이 1979년 11월 수도 테헤란의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고 직원들을 인질로 잡았습니다. 인질은 모두 66명이 이르렀습니다. 미국이 팔라비 정권을 지지했다며 벌인 사건입니다. 새로 출범한 이슬람 정권은 외세 배격을 내세웠는데. 미국을 모든 외세의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이러한 인질극 상황에서 두 번째로 맞았던 1980년의 성탄절에는 그때까지 417일간 잡혀있던 인질들을 생각하며 417초 동안만 트리 전체에 불을 밝히고는 다시 그 전해처럼 전등 하나에만 불을 밝혔습니다. 기억 행사를 벌인 셈입니다.

1923년 미국 첫 국가 성탄 트리의 모습.당시는 벌목한 나무였지만 73년부터는 생나무를 심어 사용한다. [위키피디아]

1923년 미국 첫 국가 성탄 트리의 모습.당시는 벌목한 나무였지만 73년부터는 생나무를 심어 사용한다. [위키피디아]

남은 인질들은 1981년 1월 20일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취임일에 모두 풀려났습니다. 그해 연말 설치됐던 백악관의 성탄 트리는 비로소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미국 백악관의 국가 성탄 트리는 국민의 마음을 반영하는 그릇 노릇을 한 셈입니다.

지난 12월 5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조지 HW 부시 대통령의 장례식에 참석한 로절린과 지미 카터 전 대통령 부처의 모습. 카터는 재임 당시 테헤란 대사관 인질 사태로 인기가 떨어졌으며 재선에도 실패했다. 이란과 미국은 이후 40년째 단교 중이다. [AP=연합뉴스]

지난 12월 5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조지 HW 부시 대통령의 장례식에 참석한 로절린과 지미 카터 전 대통령 부처의 모습. 카터는 재임 당시 테헤란 대사관 인질 사태로 인기가 떨어졌으며 재선에도 실패했다. 이란과 미국은 이후 40년째 단교 중이다. [AP=연합뉴스]

이란에선 매년 대학생들이 미국 대사관에 진입한 날에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행사를 벌입니다. 현재 권력을 낳은 당시 이슬람 혁명과 반외세 활동을 정치적으로 반추하는 셈입니다. 당시 미국에선 격렬한 반이란 시위가 벌어졌으며 그 이후 미국에선 보수 인사를 중심으로 이란에 대한 감정이 악화했습니다. 현재 이란의 핵 개발 의혹을 놓고 국제사회가 합의했음에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를 뒤집은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40년간의 악감정인 셈입니다.

그런데 지난 2016년 이란을 방문했다가 놀란 적이 있습니다. 경제부 장관을 인터뷰하기 위해 테헤란의 청사를 찾아갔는데 엘리베이터 안에서 미국 가수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의 '우먼 인 러브'라는 노래가 들렸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노래라서 분명히 기억합니다. 스트라이샌드는 유명한 유대인 엔터테이너이기도 합니다. 직원에게 "이란에서 미국 노래를 들어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좋은 노래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사실 이란은 정치적으로는 미국에 대항하지만, 당시 이란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미국에 문화적으로 별 거부감이 없어 보였습니다. 여성에게 머릿수건인 히잡과 몸매가 드러나지 않는 복장을 강요하는 것 외에는 나름 문화적으로 개방적인 분위기였습니다.

당시 이란 방송에선 한국 드라마 '주몽'이 방영되고 있었고, 비디오 가게에선 '대장금'이 한가운데에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이란은 한류 문화가 인기를 끄는 나라의 하나입니다. 그런 이란과 미국이 새해에는 앙금을 털고 새로운 시대를 열기를 기대해봅니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