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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한 해, 방아쇠 반동 짜릿하게 즐기는 마음으로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장연진의 싱글맘 인생 레시피(10)

한 문학상에 접수된 원고들을 관계자가 정리하고 있다(내용과 연관없는 사진). 신춘문예에 응모할 작품을 최종 퇴고하고 나서 원고를 부치러 우체국에 가기 전 미뤄 둔 일을 확인했다. [중앙포토]

한 문학상에 접수된 원고들을 관계자가 정리하고 있다(내용과 연관없는 사진). 신춘문예에 응모할 작품을 최종 퇴고하고 나서 원고를 부치러 우체국에 가기 전 미뤄 둔 일을 확인했다. [중앙포토]

신춘문예에 응모할 작품을 최종 퇴고하고 나서였다. 신문사에 원고를 부치러 우체국에 가기 전 그동안 미뤄 둔 일을 적어 놓은 목록을 잠시 확인했다. 우체국에서 배당금 찾기, 연말 모임 일정 잡기, 절임 배추 주문 등. 원고를 보내러 우체국에 간 김에 배당금을 찾아 생활비 통장에 옮기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단박 내 안에서 거부의 목소리가 올라오는 게 아닌가. 원고를 발송하고 바로 볼일을 보면 그것에 신경 쓰느라 투고한 후 송두리째 밀려오는 허탈감을 온전히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니냐고!

그제야 나는 어느새 내가 텅 빈 새장처럼 갈비뼈 안쪽이 뻥 뚫린 것 같은 그 공허감을 혼자 괴로워하면서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자 뜬금없이 20대 때 전 직장에서 요인 경호 교육을 받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 국가대표 선수 출신인 사격 교관이 한 말이 수십 년의 세월 저편에서 되살아났다. 하나는 표적의 조준점이 가늠쇠의 중앙 상단에 올라왔다고 판단하면 지체 없이 방아쇠를 당겨야 한다는 것. 연근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 둥근 탄창에 미리 장전한 6발의 실탄을 주어진 시간 안에 연달아 쏘아야 하는 권총 사격에서, 정조준에 시간을 끌면 뒤로 갈수록 팔 힘이 빠져서 되레 명중률이 떨어진다는 말이었다.

글쓰기와 교정, 양육, 요리 등 이따금 내가 하는 일에서 기대에 못 미친 결과를 얻을 때면 불쑥불쑥 이 말이 떠오르곤 했다. 처음부터 의욕만 앞서 어깨에 너무 힘을 준 건 아닌지, 그래서 뒷심이 부족해 제대로 실력 발휘도 하지 못한 건 아닌지, 그냥 평소처럼 하면 되는데 더 잘하려고 지나치게 신경 쓰다가 이도 저도 아닌 결과를 낳은 건 아닌지, 그러다가 되레 삶의 타이밍을 놓쳐 긴 슬럼프에 빠진 건 아닌지.

권총 사격은 정확한 조준 못지않게 방아쇠를 당긴 뒤 그 반동을 어떻게 제어하는지도 굉장히 중요하다.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권총 사격은 정확한 조준 못지않게 방아쇠를 당긴 뒤 그 반동을 어떻게 제어하는지도 굉장히 중요하다.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반년 가까이 씨름했던 원고를 막 퇴고한 뒤라 그런지 무엇보다 가슴에 와 닿은 교관의 말은 바로 다음 말이었다. 권총 사격은 정확한 조준 못지않게 방아쇠를 당긴 뒤 그 반동을 어떻게 제어하는지도 굉장히 중요하다는. 권총은 총신이 짧아 격발한 후 지하 사격장이 뒤흔들리듯 울리는 총성도 공포 그 자체지만 반동도 실로 어마어마하다.

고막을 산산조각낼 것 같은 그 엄청난 굉음이 지나간 뒤, 총의 손잡이를 감싸 쥔 양쪽 손아귀를 통해 팔과 어깨를 타고 두 다리로 흘러내리는 가공할 전율은 그야말로 사람을 혼비백산하게 한다.

무엇보다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6개의 약실이 자동으로 회전하는 리볼버 권총의 특성상, 그 엄청난 반동을 양손으로 탄탄히 받쳐 주지 않으면 총구가 하늘로 치솟기 일쑤다. 총구와 팔, 어깨로 이어지는 몸의 중심축이 뒤로 밀리면서 처음부터 다시 조준선을 정렬해야 해 연발할 때마다 심리적으로 시간에 쫓기게 된다.

그래서 교관은 한 발 한 발 쏠 때마다 두 손과 팔을 지나 온몸을 강타하고 지나가는 그 쇠붙이의 충격을 흔들림 없이 맞받아야 백발백중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마스터’가 되려면 그 두려움을 넘어 격발의 반작용을 손목으로 짜릿하게 즐겨야 한다고 했다.

사격할 때 사수의 눈이 가늠 구멍을 통해 가늠쇠 위에 표적을 올려놓고 조준선을 정렬하듯, 소설을 쓸때도 작가가 작중 화자의 시선을 통해 사건과 에피소드를 재배열하면서 주제의식을 부각시키기 때문에 사격술과 소설작법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중앙포토]

사격할 때 사수의 눈이 가늠 구멍을 통해 가늠쇠 위에 표적을 올려놓고 조준선을 정렬하듯, 소설을 쓸때도 작가가 작중 화자의 시선을 통해 사건과 에피소드를 재배열하면서 주제의식을 부각시키기 때문에 사격술과 소설작법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중앙포토]

그러자 사격술과 소설작법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수의 눈이 가늠구멍을 통해 가늠쇠 위에 표적을 올려놓고 조준선을 정렬하듯, 작가가 작중 화자의 시선을 통해 사건과 에피소드를 재배열하면서 주제의식을 뚜렷이 부각시키는 점. 처음부터 정조준에 너무 힘을 빼면 시간이 지날수록 사격 자세가 흔들리듯, 소설의 도입부부터 어깨에 힘을 주면 문장이 경직될뿐더러 뒷부분으로 갈수록 글의 전개가 산만해지기 쉬운 점.

특히 방아쇠를 당기고 나서 그 격렬한 반동까지 고스란히 감당해야 명중률을 높이듯, 장시간 씨름했던 원고를 손에서 떠나보낸 후 그 허허로움까지 오롯이 체감해야 다음 작품의 완성도를 끌어올릴 수 있다는 점….

세밑이어서 그런지 문득 올 한 해를 마무리 짓는 일도 이와 같지 않을까 싶었다. 입시, 취업, 결혼, 승진, 금연, 다이어트, 등단 등등. 한 해 한 해 해마다 자동으로 넘어가는 세월의 약실에 장전됐던 2018년을 걸어 당긴 그 방아쇠의 반작용을 피하지 않고 저마다 뒷심으로 받아내는 일. 설사 올해도 삶의 조준선이 흔들려 예의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하더라도 일희일비하지 않고 그 빗나간 표적을 담담히 점검하는 일.

비록 그 반향이 너무 얼얼해 즐기지는 못할지라도, 그렇게 끝까지 자세를 풀지 않고 가는 해를 뒷감당하다 보면, 철커덕 시간의 탄창이 돌아가 새해가 다시 장전돼도 허둥대지 않을 터였다. 아니, 보다 차분히 목표의 조준선을 새로이 가다듬어 이듬해 2019년의 탄환을 가뿐하게 쏘아 올릴 수 있을 터였다.

장연진 프리랜서 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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