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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수술 뒤 말도 손도 어눌해진, 일곱살 아이가 쓴 편지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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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장연진의 싱글맘 인생 레시피(7) -"엄마, 아이들은 가만히 있는게 도와주는 거래요"

“이미 15살 때 기교를 습득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어린이처럼 그리는 데 60년이 걸렸다.” 스페인 출신 입체파 화가 피카소의 말이다. 뇌출혈로 수술을 받기 전이나 후에도 둘째는 변함없이 피카소의 이 말을 떠올리게 했다.

50여 일 만에 퇴원한 둘째를 데리고 처음으로 아파트 놀이터에 나간 날 아이와 나 우리 둘은 상처를 받았다. [사진 pixabay]

50여 일 만에 퇴원한 둘째를 데리고 처음으로 아파트 놀이터에 나간 날 아이와 나 우리 둘은 상처를 받았다. [사진 pixabay]

50여 일 만에 퇴원한 후, 아이를 데리고 처음으로 아파트 놀이터로 나간 날이었다. 마침 7살 둘째 또래 아이들 넷이 모래밭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저수지 놀이를 하고 있었다. 모래로 둥글게 둑을 만든 뒤 근처 수돗가에서 저마다 가지고 온 물통에 물을 받아 와 부지런히 못을 채웠다.

둘째를 데리고 가서 아파서 이렇게 머리가 짧고 말을 잘 못 하는데 같이 좀 놀아줄 수 있느냐고 이해를 구했다. 아이들이 “네!” 합창을 해서 얼마나 고마운지 코끝이 찡했다. 놀이가 끝나면 상가 마트로 데리고 가 맛있는 걸 사 줘야겠다는 마음이 절로 샘솟았다.

그런데 물을 받으러 몇 번 수돗가로 따라갔던 둘째가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먼저 돌아왔다. 또래 중 한 아이가 너 계속 따라오면 혼내주겠다며 내쫓았다고 손짓 발짓 섞어가며 말하더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아이들이 철없이 한 행동을 가지고 뭐라 할 수도 없고, 둘째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주변머리 없는 나 자신만 마구 타박했다. ‘이 바보 등신아. 과자 보따리를 풀 거면 미리 풀었어야지.’ 하지만 어느새 눈앞이 어른거리며 아프기 전 아이가 했던 통통 튀는 표현이 가슴을 헤집고 올라오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한쪽 발이 저리다고 앙감질하며) 아, 발바닥에 별이 떠서 반짝반짝해!
(베란다 창밖으로 함박눈이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TV 화면이 하얗게 춤을 추는 것 같아. 왜 할머니 머리에만 흰 실이 나와?
(여름에 더워서 좀 떨어지라고 하면) 엄마 뱃속엔 선풍기 없어?

그렇게 어린이 특유의 천진난만한 감수성으로 뒤늦게 글을 쓰겠다고 대학원에 들어간 엄마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었는데, 어린이처럼 그리는 데 60년이 걸렸다는 피카소의 말이 무슨 뜻인지 곱씹게 해주었는데….

아프기 전 둘째의 통통 튀는 표현은 어린 아이의 감수성에서 글을 써야겠다는 나에게 신선한 자극과 도움을 주었다. [사진 pixabay]

아프기 전 둘째의 통통 튀는 표현은 어린 아이의 감수성에서 글을 써야겠다는 나에게 신선한 자극과 도움을 주었다. [사진 pixabay]

그런데 아인 못난 엄마처럼 속울음만 삼키고 있지 않았다. 내 속이 이렇게 쑥대밭인데 저 어린 속은 오죽할까 싶어 욕조에 물을 받아 목욕을 시키는데 자꾸 한 음절로 된 말만 반복했다. 막 언어치료를 시작할 무렵이라 도무지 그 쇳소리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이가 답답했는지 물을 뚝뚝 흘리며 욕조 밖으로 나오더니 말을 바꿔 실을 찾았다. 그 말은 얼른 알아듣고 방으로 데려가 옷장에서 아예 반짇고리를 꺼내 보여주었다. 그랬더니 실이 아니라 바늘을 집어 들더니 침을 놓듯 조심스레 자기 팔을 계속 찌르는 시늉을 하는 게 아닌가!

세상에, 아 세상에…. 발음기관의 마비가 빨리 풀리게 침을 맞겠다는 소리였다. 아무리 침, 침 발음해도 엄마가 못 알아들으니까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두 개의 연관 사물을 거쳐 기어이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다. “침을 맞으면 마비를 푸는 데 도움이 되지만 어린아이라…”

또래에게 얼마나 상처를 입었으면 병원에서 주치의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 일곱 살배기 아이가 제 입으로 침을 맞겠다고 할까. 나는 너무 미안하고 대견하고 안타까워서 아이를 끌어안은 채 한동안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정반대로 자기 엄마를 자식 자랑하는 팔불출로 만든 그 반전은 그야말로 나를 ‘빵 터지게’ 했다. 하루는 둘째가 낮잠 자는 틈을 이용해 포기김치를 담그는데 아이가 중간에 눈을 비비며 밖으로 나왔다. 주방에 널린 김칫거리들을 보더니 엄마 혼자 이걸 언제 다하느냐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의 재활치료를 위해 매일같이 병원과 언어치료실을 다니랴, 집안일을 하랴 잠시도 쉬지 못하는 엄마가 마음이 쓰이는 모양이다.

그러던 아이가 방으로 들어가 잠잠하기에 더 자나 보다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둘째가 다시 주방으로 나오더니 불쑥 내 앞으로 줄 공책을 북 찢어 쓴 편지 한장을 내밀었다. 편지를 쓰느라 끙끙 힘이 들었는지 귀밑머리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아이가 장연진 씨를 위해 쓴 편지. [사진 장연진]

아이가 장연진 씨를 위해 쓴 편지. [사진 장연진]

아직 오른쪽 손과 팔의 마비가 제대로 풀리지 않아 병원에서 아귀힘을 기르기 위해 한글 따라 쓰기 숙제 한 페이지를 내주면 1시간이 넘게 걸릴 때였다. 잠시 일손을 멈추고 삐뚤빼뚤 맞춤법도 엉망인 짧은 글을 읽어 내려갔다.

힘든 엄마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어찌할 줄을 모르는 아이의 안타까운 마음이 꾸밈없이 드러나 절로 입가가 벌어졌다. 그러다가 맨 마지막 문장에 가서는 기습이라도 당한 듯 혀를 내둘렀다. 세상에 이리 쉽고 단순하게 글을 반전시킬 수도 있는 거구나! 앞으로 피카소가 말한 그 ‘60년’이 지나도 나는 결코 이렇듯 경쾌한 반전이 있는 글은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둘째가 그 가냘픈 손으로 온 힘을 다해 쓴 편지의 틀린 철자만 바꾸면 이렇다.

엄마 사랑해요. 엄마 많이 힘들죠? 저가 도와줄 거 있으면 말해 보세요. 엄마 청소할까요? 아니면 다른 거 도와줄까요? 그런데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말이 있는데요. 아이들은 가만히 있는 게 더 도와주는 거래요!

장연진 프리랜서 작가 novljyj@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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