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둘째의 ‘표’ 발음에 신바람… ‘탕진잼’ 만끽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장연진의 싱글맘 인생 레시피(9)

말이 어눌하다고 또래로부터 따돌림을 당한 뒤 침을 맞겠다고 자진했던 둘째는 그 두려움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둘째가 뇌수술을 받은 대학병원 통증의학과 선생님도 7살 아이가 고통을 견딜지 모르겠다며 일단 레이저 시술부터 시도했다. 담배 크기만 한 검은 침으로 배와 머리에 붉은 레이저를 쏘는 시술이었는데, 아이가 세 번을 맞더니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음을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치료는 바로 중단됐다.

대신 둘째는 언어치료를 받을 땐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둘째가 힘들어 한 단어 중 하나는 ‘감옥’이다. 무슨 말끝에 감옥에 대한 얘기가 나왔는데 제대로 발음이 되지 않는다며 인상을 썼다.

둘째의 뇌 수술과 운동·작업·언어 치료 과정을 기록한 병상일기. 이 일기를 바탕으로 연재를 실으면서 마음의 지층에서 해묵은 아픔과 기쁨이 뭉클뭉클 올라와 혼자 울고 웃곤 했다. [사진 장연진]

둘째의 뇌 수술과 운동·작업·언어 치료 과정을 기록한 병상일기. 이 일기를 바탕으로 연재를 실으면서 마음의 지층에서 해묵은 아픔과 기쁨이 뭉클뭉클 올라와 혼자 울고 웃곤 했다. [사진 장연진]

입술소리 ‘ㅁ’이 여린입천장소리 ‘ㄱ’과 단모음 ‘ㅗ’에 묻혀 자꾸만 가옥, 가옥 했다. 발음기관이 마비된 상태에서 여린입천장소리와 입술소리를 동시에 발음하는 게 힘이 들어서다. 저렇게 얼굴이 일그러질 정도로 애를 쓰는데 어떻게 하면 쉽게 이 난관을 극복하게 할 수 있을까.

몇 차례 내 입 모양을 연구한 뒤 아이에게, 잔뜩 화가 나서 나쁜 사람을 내쫓듯 입천장 뒤쪽에 힘을 주고 가! 가! 소리치라고 했다. 그런 다음 그 소리가 입 밖으로 도망치지 못하게 꽉 입술을 닫아 가두라고 했다. 가, 가, 감, 감, 감. 그렇게 한열 번 따라 했을까. 드디어 둘째가 “감옥!” 하고 정확한 발음을 터뜨렸다. 아이의 이마엔 어느새 비지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야말로 아이가 감옥이라는 발음에 꼼짝없이 갇혔다가 풀려나는 것 같았다.

다음으로 둘째를 골탕 먹인 단어는 ‘유월’이다. 병원에서 아귀힘을 기르기 위해 내준 한글 따라 쓰기 숙제를 하다가 사달이 났다. ‘유’는 그대로 소리가 나는데 ‘월’이 자꾸 ‘덜’로 발음이 된다며 숙제를 하다 말고 씨름을 했다. 신기한 점은 감옥과 달리 유월을 붙여 읽히면 온전히 소리를 낸다는 점이다. 언어치료실에 가는 날도 아니고, 그 원인을 찾기 위해 또 내 발음기관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문제는 ‘월’의 첫소리가 이중모음으로 시작된다는 점에 있었다. 단모음과 달리 이중모음은 소리를 내는 도중에 입술 모양이나 혀의 위치가 바뀌는데 발음기관의 마비가 덜 풀린 둘째에겐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처음에 입술을 바짝 오므렸다가 풀면서 받침소리 ‘ㄹ’ 발음까지 한꺼번에 내야 하는데, 아이는 그게 힘이 부친 나머지 입술 근육을 긴장시키지 않은 채 발음을 해서 엉뚱한 소리가 새 나왔다.

그런데 ‘유’와 붙일 땐 유의 발음이 자연스레 입술을 모아주니까 제소리가 나왔다. 그래서 나는 이중모음 ‘워’를 단모음 ‘우’와 ‘어’로 쪼갠 다음 준비운동 하듯 우, 어, 우, 어 반복시켰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워’로 빠르게 합치게 했더니 아이가 그날로 ‘월’의 문턱을 넘어섰다.

둘째는 이중모음을 발음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아이가 두 주먹까지 불끈 쥐고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온 힘을 입술에 모았지만 아래턱이 따라 움직여 주질 않았다. (내용과 연관없는 사진) [중앙포토]

둘째는 이중모음을 발음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아이가 두 주먹까지 불끈 쥐고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온 힘을 입술에 모았지만 아래턱이 따라 움직여 주질 않았다. (내용과 연관없는 사진) [중앙포토]

그러나 우표의 ‘표’자에 제동이 걸렸을 땐 하루로는 부족했다. 또 병원에서 내준 숙제를 하다가 ‘우표’가 ‘우포’로 발음이 되자 둘째가 당장 연필을 내려놓더니 나를 불러 앉혔다. 파열음 ‘ㅍ’은 자연 해결이 돼서 다행인데 또 그놈의 이중모음 ‘ㅛ’가 문제였다. 먼저 오, 오 훈련하다가 강세를 줘 요, 요 하게 이끌었지만 진전이 없었다. 아이가 두 주먹까지 불끈 쥐고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온 힘을 입술에 모았지만 아래턱이 따라 움직여 주질 않았다.

지켜보기 너무 안쓰러워 한숨 자고 내일 하자고 했다. 그래도 안 되면 언어치료 선생님에게 부탁해 보자고도 했다. 그러나 둘째는 막무가내였다. 마비됐던 오른쪽 팔과 다리가 이렇게 좋아진 것처럼 언어치료도 단계가 있다고, 발음이 쉬워서 즉석에서 해결되는 것도 있지만 어려워서 며칠 걸리는 것도 있는데, ‘요’가 바로 그런 경우라고 거듭 설득하자 그제야 시무룩이 물러났다.

땀과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씻겨 재운 뒤 직성이 풀리지 않아 골난 표정으로 잠든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보는데 세종대왕이 다 원망스러웠다. 어디 ‘요’뿐인가. 예와 얘, 에와 애 등 왜 구분하기도 힘든 이중모음을 만들어서 번번이 아이를 힘들게 하는지.

내 딸이지만 둘째는 정말 집요했다. 저 작은 몸 어디에 저런 오기가 숨어 있나 싶었다. 오, 오, 요, 요, 표! 이튿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혼자 훈련하더니 드디어 “표!” 발음을 완벽히 터뜨리는 게 아닌가! 엄마, 엄마 쫓아 나와 의기양양하게 표, 표 하는 아이를 얼싸안고 장하다고 등을 두들겨 주는데 울컥 목이 잠겼다. “우리 딸 뭐 먹고 싶어? 있다가 엄마가 언어치료 마치고 뭐든 다 사 줄게.”

언어치료가 끝난 뒤 약속대로 치료실 근처 피자집으로 갔다. 메뉴판을 활짝 펼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다 시키라고 했더니 둘째가 진짜? 하며 피자, 스파게티, 버팔로윙, 옥수수 버터구이, 샐러드 등을 마음껏 주문했다. 음식이 속속 나오자 "우와! 우와!" 엉덩이를 들썩들썩하며 좋아 어쩔 줄 몰랐다. 어젯밤 끙끙 용을 쓰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요것조것 야금야금 골라 먹으며 아주 신바람이 났다.

아이의 그런 해맑은 표정에 고무돼 모처럼 나도 병구완 스트레스 따위 싹 날려버리고 한가득 놓인 음식들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마치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16년 전 그날 우리 모녀는 그렇게 일찌감치 ‘탕진잼’을 만끽했다.

장연진 프리랜서 작가 novljyj@naver.com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