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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저출산 문제 '열린 사고'로 풀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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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지난해 가임 여성 1명이 낳은 평균 자녀 수는 1.08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치다. 낮은 출산율은 인구의 고령화 추세를 가속시켜 미래의 한국 사회는 침체와 쇠퇴의 길로 들어서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증폭시켜 왔다. 이에 정부는 8일 저출산.고령 사회 기본계획을 발표했으며, 202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 수준인 합계 출산율 1.6명을 목표로 하고 있다.

출산율을 안정시키기 위한 정부의 기본계획은 출산 행위를 결정하는 다양한 사회경제적 요인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종합대책을 모색한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현상적인 문제의 단기적 처방만 보일 뿐 왜 이런 변화가 진행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나 장기적 방향 설정이 미흡하다. 출산율 하락은 사회 변동이라는 큰 틀에서 보면 21세기 후기 근대사회 삶의 패러다임이 바뀌어 가는 현상으로 봐야 한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오면서 인간의 삶이 많이 바뀌었듯 후기 근대사회에서도 패러다임적 전환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출산에 대한 사회적 대처는 인식의 전환과 '열린 사고'를 필요로 한다.

첫째, 남성은 생계 부양, 여성은 양육 및 가사 담당이라는 성 역할 분담을 지지하고 성 차별을 지속해 온 각종 사회제도와 문화에 대한 수정이 필요하다. 출산율 하락은 이미 20여 년 전부터 예상됐던 것이며, 이는 오랫동안 지속돼 온 가부장적 사회질서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다. 맞벌이 부부가 전체 가구의 절반에 가깝지만 우리는 여전히 여성에게 가사와 양육 책임을 전담시키며, 노동시장에서는 여성을 보조적 노동력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성 차별적 제도.문화가 여성을 '출산 파업'으로 이끈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성 역할 분담이 남성의 결혼 및 자녀관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요즈음 젊은 남성들은 아버지 세대와 달리 일찍 결혼해 평생 가족 부양의 부담을 지는 것을 싫어하며, 때로는 결혼과 자녀 출산을 회피하거나 시기를 늦추려 한다. 정부 대책은 양성 평등을 강조하지만 여성의 취업을 '자아 실현'으로 표현하고, 남성에게 3일의 배우자 출산휴가를 주도록 함으로써 성 역할에 대한 경직된 사고를 보여 준다. 재정 부담과 고용 위축을 이유로 일.가족 양립제도 도입에 반발하는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둘째, 우리도 자녀 출산과 양육을 결혼 관계에만 허용하는 결혼중심주의에 도전할 때가 된 것 같다. 출산율 안정에 성공했다고 평가되는 프랑스를 보면 신생아의 절반이 독신 여성이나 동거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다. 정부가 이번에 밝힌 정책 대상은 정상 가족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흔히 이런 이야기를 하면 너무 급진적이라거나 사회적 혼란을 부추긴다고 비난받기도 한다. 그러나 결혼을 통해 충족돼 오던 친밀성의 욕구는 후기 근대사회에서 구조적 변동을 일으키고 있다는 학자들의 주장이 아니라도 급변하는 우리의 삶을 성찰할 필요가 있다. 이미 낮은 출산율을 경험한 서구 국가들을 보면 성 역할 구조를 완화하지 않는 한, 자녀 출산과 양육을 혼인 관계에만 허용하는 결혼중심주의를 해체하지 않는 한, 출산율 안정은 기대하기 어렵다.

즉 전통적 성 역할의 구분이 약화되고,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며, 결혼 외 관계에서의 출산이 문화.제도적으로 허용될 때 출산율 상승 효과가 나타난다. 프랑스와 스웨덴이 성공적인 사례로, 일본과 이탈리아가 실패한 사례로 거론되는데 이들 국가의 차이는 가부장적 문화의 강건함이다.

출산율의 안정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문화적 조건들에 도전하고자 하는 의지 없이는 이뤄내기 어렵다. 아이를 낳고 기르고자 하는 성인 남녀, 양질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기업, 국가의 번영을 꾀하는 정부 모두 전통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할 때다.

이재경 이화여대 교수·여성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