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바루기] 첫눈 오신 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경제 04면

첫눈이 오는 날엔 약속이 많다고 한다. 연인끼리, 가족끼리, 친구끼리 등 이런저런 약속을 한다. 왜일까?

첫사랑, 첫키스, 첫출근 등처럼 처음이 가지는 의미가 크다. 첫은 무엇보다 설렘으로 다가온다. 거기에다 눈은 세상을 온통 하얗게 뒤덮이게 한다. 하얀색은 어느 색보다 순수하고 깨끗한 이미지를 주므로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는 것은 세상이 온통 순수로 뒤덮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그런지 첫눈이 내리면 왠지 가슴이 설레고 누군가가 그리워진다.

며칠 전 서울 등 수도권에도 첫눈이 내렸다. 제법 많이 쌓일 정도였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첫눈에 관한 사진과 글이 많이 올라왔다. 그중에서 ‘첫눈이 오신 날’ ‘첫눈이 오셨어요’라는 제목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커피 나오셨어요” 등처럼 사물을 존대하는 표현이 만연하는 것에 대해 이 난(欄)에서 다룬 적은 있지만 첫눈에 이렇게 존댓말을 쓰는 것은 처음 본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첫눈의 의미가 워낙 크다 보니 첫눈을 의인화해 이렇게 사람처럼 높임말을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첫눈을 의인화한 표현을 별로 보지 못했다는 점에서 혹여나 이것도 사물존대에 익숙해진 탓에 자연스럽게 나온 표현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첫눈을 의인화한 표현이라면 크게 시비를 걸 만한 사안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시’를 남용하는 탓이 아닌가 싶다.

알다시피 ‘시’는 존경을 나타내는 어미다. 상위자와 관련된 동작이나 상태와 결합해 그를 높이는 말로 쓰인다. 주어는 상위자 또는 상위자의 신체 일부가 된다. “아버님께서 오셨습니다(오시었습니다)” “선생님은 키가 크시다” “충무공은 훌륭한 장군이셨다” 등처럼 사용된다. 따라서 사물인 눈(첫눈)에는 ‘시’라는 존칭을 붙일 수 없다. 만약 눈을 의인화한 시적 표현이 아니라면 ‘첫눈이 오신 날’은 ‘첫눈이 내린 날’, ‘첫눈이 오셨어요’는 ‘첫눈이 왔어요’가 적절한 말이다.

배상복 기자 sbbae@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