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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가난한 소년을 울렸다…내가 무슨 짓을 한걸까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박재희의 발로 쓰는 여행기(9)

토마르까지 가는 유칼립투스 숲길에 아침 안개와 함께 피톤치드 향이 가득하다. 포르투갈의 건조한 토질에 잘 맞고 생장 기간이 짧은 유칼립투스 나무는 코르크나무와 올리브 나무와 함께 포르투갈 3대 수종으로 꼽힌다. [사진 박재희]

토마르까지 가는 유칼립투스 숲길에 아침 안개와 함께 피톤치드 향이 가득하다. 포르투갈의 건조한 토질에 잘 맞고 생장 기간이 짧은 유칼립투스 나무는 코르크나무와 올리브 나무와 함께 포르투갈 3대 수종으로 꼽힌다. [사진 박재희]

터키에서 온 알레이나(Aleyna)를 만나 토마르(Tomar)까지 유칼립투스 숲을 함께 걸었다. 템플기사단의 역사가 서린 토마르에서 12세기부터 18세기까지 차곡차곡 종교와 예술이 쌓인 고요하고 아름다운 도시를 돌아봤지만 알레이나를 만난 그 날 내 마음은 이스탄불로 날아가 돌아오지 못했다.

‘아줌마, 나쁜 사람이에요. 정말 너무해요.’ 아이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틀림없다. 아이는 실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며 어깨를 떨구더니 몇 차례나 두 팔과 어깨를 흔들었다. 두 눈 가득 원망을 담고 나를 올려다보며 낮게 중얼거린 말은 분명 그런 뜻이었다.

유칼립투스 숲길의 순례 방향 화살표. 2018년 40도를 넘는 폭염으로 자연 발화, 화재에 취약한 수종인 유칼립투스 숲에 소방도로를 내는 등 대규모 벌목이 이뤄졌다. [사진 박재희]

유칼립투스 숲길의 순례 방향 화살표. 2018년 40도를 넘는 폭염으로 자연 발화, 화재에 취약한 수종인 유칼립투스 숲에 소방도로를 내는 등 대규모 벌목이 이뤄졌다. [사진 박재희]

“아냐. 더 깎으려는 게 아니라 지금 돈이 없다고. 돌아와서 꼭 살게.”
아이의 눈에 차오르는 실망과 분노에 당황한 나는 지갑 안을 보여줬다. 지갑에는 터키 돈 10리라 지폐 한장뿐이다. 내 딴에는 열심히 손짓 눈짓으로 환전해야 한다고 설명했지만 뜻이 통하지 않는다. 아이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 같더니 이내 무릎에 얼굴을 묻는다. 난감했다.

“……얘야, 그게 아니야… 여기서 기다려줘. 곧 돌아올게.”
어찌할 바를 몰라 우물쭈물하다 정신이 들었다. 이러고 있을 일이 아니라 빨리 환전을 해서 돌아오자. 환전소 위치를 기억에서 더듬으며 급히 돌아섰다.

며칠 동안 오가며 눈이 몇 번 마주쳤던 아이였다. 한 번도 무슨 말을 하는 것을 본 적은 없었다. 척 보기에도 허가 없이 난전 귀퉁이에 눈치껏 자리를 편 모습이었다. 보자기 위에는 스카프, 주머니칼, 몇 가지 그릇이 계통 없이 놓여있었다. 주변 상인들이 큰 소리로 터키어와 영어를 섞어 호객하는 반면 아이는 그냥 앉아있었다. 여러 날 앉아있기만 했던 아이가 그날 아침 갑자기 내게 말을 건넨 것이다.

토마르의 그리스도 수도원 (Convento de Cristo). 12세기 템플 기사단의 요새로 지어졌다. 기사단이 해체된 후 시대를 따라 로마네스크, 마누엘, 고딕, 르네상스와 바로크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화를 반영하는 포르투갈의 가장 중요한 유산 중 하나이다. [사진 박재희]

토마르의 그리스도 수도원 (Convento de Cristo). 12세기 템플 기사단의 요새로 지어졌다. 기사단이 해체된 후 시대를 따라 로마네스크, 마누엘, 고딕, 르네상스와 바로크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화를 반영하는 포르투갈의 가장 중요한 유산 중 하나이다. [사진 박재희]

“피프티(50) 리라. 마담, 에일레(50) 리라.”
내가 그릇에 관심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놋그릇을 들어 보여줬다. 수줍은 건지 옆 사람 눈치를 보는 건지 들릴락 말락 말을 걸어놓고 눈을 맞추지도 못했다. 아이가 들고 있는 그릇은 의외로 고급스러워 보였다. 이집션 바자르나 그랜 바자르에서 흔히 파는 얄팍한 느낌이 아니라 제법 도톰한 놋그릇이었다.

살 생각이 없었는데 순간 맘이 동했다. 터키에서 반값으로 깎는 것은 기본이라고 했으니 반값이면 만원이 채 안 된다. 가격이 놀랄 만큼 싸기도 했지만 열 두어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의 수줍음에 마음이 끌렸다.

“트웬티(20) 리라.”
나는 웃으며 손가락을 두 개 펴고 가격을 불렀다. 아이는 깜짝 놀라는 표정으로 세차게 고개를 젓더니 손바닥을 쫙 펴서 내게 보여줬다.
“마담. 노, 마담. 50리라.”

토마르의 레프블리카 광장 (praca da republica) 은 도시를 돌아보는데 가장 중심이 되는 지점이다. 사오 조아오 뱁티스타 성요한 성당(sao joao Baptista)이 그리스도 수도원을 마주 보고 서 있다. [사진 박재희]

토마르의 레프블리카 광장 (praca da republica) 은 도시를 돌아보는데 가장 중심이 되는 지점이다. 사오 조아오 뱁티스타 성요한 성당(sao joao Baptista)이 그리스도 수도원을 마주 보고 서 있다. [사진 박재희]

애초에 거절할 수 없는 가격을 제시했다는 듯, 50리라 아래로는 절대 안 된다고 말하는 아이의 진지한 표정이 귀엽기도 했다. 나와 눈을 맞춘 아이는 자신 없는 표정으로 나를 살피면서 손가락을 하나 오므린다. 40리라를 내라는 것이다. 장난삼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이는 손가락 하나를 더 접었다. 30리라. 포기가 너무 빨라 이쯤에서 그냥 살까 하다가 녀석의 반응이 귀여워 한 번 더 고개를 저었다.

"오케이 마담, 오케이. 20리라."
아이는 억울한 표정으로 흥정을 받아들였다. 서럽게.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다. “오케이”라고 말은 했으면서 온몸으로 특히 아이의 눈, 작은 어깨는 헐값으로 팔아야 하는 것이 서러워했다. 그제야 꼬질꼬질한 아이의 옷소매와 유난히 조그만 손이 눈에 들어왔다. 늘어진 옷깃 사이로 가냘픈 아이의 목덜미가 보였다.

노련한 장사꾼이 아니라 겁먹은 얼굴을 한 소년. 다급하고 절박해 보이는 작은 아이. ‘사정하듯 겨우 말을 붙인 아이에게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40리라는 줘야겠다고, 악착같이 깎아서 뭘 하겠냐고 생각하며 웃으며 지갑을 꺼냈다. 깎아놓고 값을 더 쳐주면 좋아하겠지 그런 마음이었다. 그런데 아뿔싸! 돈이 없다. 시내에 나와 환전한다는 것을 깜박 잊고 있었다.

이스탄불 블루모스크의 야경. 작년에 찾았던 이스탄불의 관광지에는 '저는 시리아에서 온 난민입니다. 도와주세요.' 메모를 들고 앉아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진 박재희]

이스탄불 블루모스크의 야경. 작년에 찾았던 이스탄불의 관광지에는 '저는 시리아에서 온 난민입니다. 도와주세요.' 메모를 들고 앉아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진 박재희]

“오해하지 마. 지금 10리라밖에 없어. 금방 돌아올게. 미안해.”
설명해 보려고 했지만 아이는 듣지 않았다. 억울한 표정이던 아이는 이제 소매로 눈물을 찍어내고 있었다.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는 순간 난 알 수 없는 통증과 함께 현기증을 느꼈다.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과 미안함. 환전소로 가겠다는 생각으로 허둥지둥 일어나 돌아섰다. 사람을 헤치며 급히 가려는데 내 옆을 막아선 아이가 손을 내밀고 있었다.

한쪽 소매 끝으로 눈물을 찍어내면서 다른 손으로 그릇을 들어 내게 내밀었다. 아이는 내가 10리라로 흥정을 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나도 억울하고 답답했다. 돈을 바꿔서 다시 오겠다고 말해봤지만 아이는 같은 말만 반복한다.
“마담. 10리라 오케이. 10리라. 10리라 오케이.”

초등학교 5학년 내 조카쯤 되어 뵈는 아이가 어떻게 이런 허무와 단념의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빨갛게 충혈되고 눈물이 차오르는 눈. 지갑을 열어 10리라를 건넨 순간 아이는 그릇을 팽개치듯 던지고 사라졌다. 10리라. 커피 한 잔 값도 되지 않는 돈으로 아이를 울렸다. 아이를 서럽게 만들고 귀한 물건을 빼앗은 꼴이라니. 창피했다. 미안한 마음이 전기처럼 등을 타고 계속 오르내렸다.

이스탄불 뉴모스크 주변의 바자르. 늦은 시간까지 소년을 찾아 헤맸다. [사진 박재희]

이스탄불 뉴모스크 주변의 바자르. 늦은 시간까지 소년을 찾아 헤맸다. [사진 박재희]

다시 아이를 찾아갔었다. 50리라를 주머니에 넣고 나는 빅 모스크 옆 골목으로 갔다. 아이는 없었다.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며칠 동안 같은 자리에 있던 아이가 웬일인지 더는 보이지 않았다. 그날 이후 이스탄불을 떠나기 전까지 나는 매일 에니메뉘 역에 내려 아이 손을 놓쳐버린 엄마처럼 골목을 뒤졌다.

끝내 만나지 못했다. 아이에게 주려고 챙겨 넣어둔 50리라는 귀국 길의 가장 무거운 짐이었다. 50리라는 아직도 여행 지갑 맨 앞칸에 부적처럼, 마른 꽃잎처럼 끼워져 있다.

이스탄불의 보스포러스 해협. 바다 수영을 즐기는 아이들을 보면서 뉴모스크 옆 골목에서 난전을 차리고 물건을 팔던 소년이 떠올랐다. [사진 박재희]

이스탄불의 보스포러스 해협. 바다 수영을 즐기는 아이들을 보면서 뉴모스크 옆 골목에서 난전을 차리고 물건을 팔던 소년이 떠올랐다. [사진 박재희]

박재희 모모인컴퍼니 대표·『산티아고 40일간의 위로』 저자 jaeheecal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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