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회담 제안도, 南 포럼 초청도…北은 지금 ‘읽씹 모드’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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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방북한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을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이 배웅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0월 방북한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을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이 배웅하고 있다. [연합뉴스]

 북한이 한국과 미국의 대화 손짓에 연일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지난 8일 열릴 예정이었다가 연기된 북ㆍ미 고위급 회담의 11월 중 개최는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관련 사정에 밝은 대북 소식통은 “미국이 몇 개의 날짜를 북한에 제안했는데 전혀 답이 없는 것으로 안다. 이달 중 가능한 마지막 날짜가 미국에서 부활절 연휴 끝나고 26~28일 무렵이었는데 이제는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고 전했다. 고위급 회담의 미국 측 대표인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참석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수행해 29일께 아르헨티나로 출발할 예정이다.
미국에만 답이 없는 게 아니다. 정부는 28일 열린 한ㆍ미ㆍ중ㆍ일ㆍ러 외교 당국자들이 참석하는 반관반민(半官半民ㆍ1.5트랙) 행사인 ‘2018 동북아평화협력포럼 및 정부 간 협의회’에 와달라고 북한 외무성 인사를 초청했지만, 답을 받지 못했다. 불참 의사를 밝힌 것도 아니고 아예 답이 없었다고 한다. 동북아 철도공동체와 한반도 평화체제 등 북한이 관심을 보일 만한 사안들이 주된 의제였지만 북한은 응답하지 않았다.
정부는 어렵게 미국을 설득해 지난 25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위원회로부터 남북 간 철도ㆍ도로 연결 사업을 위한 공동조사에 대해 제재 면제를 승인받고 이번주 중 공동조사에 착수할 수 있다는 기대를 표명했다. 북한은 이에 대해선 28일 입장을 알려왔다.

이태호 외교부 2차관이 28일 서울 종로구 포시즌스호텔에서 열린 2018 동북아평화협력포럼 개막식에서 참석자들과 인사하고 있다. [뉴스1]

이태호 외교부 2차관이 28일 서울 종로구 포시즌스호텔에서 열린 2018 동북아평화협력포럼 개막식에서 참석자들과 인사하고 있다. [뉴스1]

북한의 침묵을 두고 외교가에선 한국도, 미국도 북한에 ‘읽씹(SNS 메시지를 읽고 답하지 않음)’당하고 있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사실 상대방의 제안에 응하지 않으며 시간을 끄는 것은 북한의 전형적인 협상 전술 중 하나다. 한 전직 외교관은 “직전에 일정을 갑자기 변경 혹은 취소하거나 무시하 듯 답하지 않는 것은 협상력을 높일 때 자주 쓰는 북한의 수법이기도 하다”고 전했다. 실제 1차 북ㆍ미 정상회담 전 양측이 판문점에서 사전 실무협상을 할 때 북측 대표인 최선희 외무성 부상이 약속해놓고 나타나지 않아 미국 측 대표인 성김 주필리핀 미국 대사만 혼자 나와 기다리다 그냥 돌아간 경우도 있다고 한다. ‘노쇼’ 역시 북한의 협상 전술인 셈이다.
하지만 그 기저에는 비핵화 협상이 본격화하는 데 대한 북한의 깊은 고민과 부담이 깔렸다는 분석이다. 미국이 2차 북ㆍ미 정상회담이 열린다면 반드시 실질적 비핵화 성과가 나와야 한다고 벼르고 있기 때문이다. 외교 소식통은 “또 정상회담을 한다면 6월 싱가포르 공동성명 수준의 결과로는 절대 안 된다는 게 미국의 입장이고, 이를 위해 고위급 회담과 실무 회담을 통해 사전 협상을 제대로 하겠다는 것”이라며 “북한이 판을 깨겠다는 생각은 결코 아닌데, 진지한 협상에 임하기에는 아직 준비가 덜 된 것 같다”고 전했다.
북ㆍ미 간 대화 국면이 조성된 지는 6개월 이상 지났지만, 사실 비핵화 협상은 아직 제대로 시작되지도 않았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약속만 있었을 뿐이다. 미국은 이를 이행하는 차원에서 핵 신고와 이미 약속한 시설에 대한 검증 등에 응하라고 북한에 요구하는데, 북한으로선 상응조치를 전혀 받지 못한 채 이에 응할 경우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미국이 한ㆍ미 연합훈련 축소, 전략 폭격기의 한반도 상공 비행 중단 등 잇따라 ‘당근’을 흔들고 있지만, 북한이 결단을 내리기에는 이 정도로는 부족한 셈이다.
하지만 미국이 북한의 장고에 얼마나 기다려줄지는 미지수다. 최근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가 한국에 “기회의 창이 닫히고 있다”고 한 것도 성과 없는 시간 끌기라는 판단이 들면 북한을 ‘강퇴(강제퇴장)’할 수도 있다는 경고라는 분석도 나온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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