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청동기 탄천에선 무슨 일이…

중앙일보

입력

분당 중앙공원의 광장 바로 뒷편 산 기슭에는 크기가 다른 '돌덩어리' 10개가 모여 있다. 중앙에는 길이 2m가 넘고 무게도 8t 가까이 됨직한 큰 돌이 놓여 있다. 야외수업 나온 여고생들이 그 위에 올라 앉아 글짓기를 하고 있다. 고인돌이라고 알려주자 "이 밑에 죽은 사람이 있냐"며 깜짝 놀라 물었다.

맞는 얘기다. 고인돌은 선사(先史:문자기록이 있기 전)시대에 주검을 묻던 무덤 양식이다. 기원전 약 1000년 전쯤부터 기원저 300년 전까지 700여년간 한반도 전 지역(제주도 포함) 및 만주 일대에 유행했던 묘 형태다. 전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와 북으로 중국 요동, 남으로 일본 큐우슈 지역서만 발견되고 있다. 당시 이들 지역 사람들은 같은 문화권에 속했던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선사시대는 시기 별 사용된 무기.도구에 따라 구석기.신석기.청동기 시대로 나뉜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묘제다. 그 때 사용된 토기는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 이후 나타난 무문(無紋)토기다. 무늬가 없다는 뜻의 민무늬토기로도 불린다.

성남에선 총 9곳에서 고인돌 군(群)이 발견됐다.

10여 년 전 분당신도시 건설때 7곳에서 총 116기(基:무덤.비석.기계 등을 세는 단위)를 발견했다. 고인돌은 주로 성남을 관통하는 탄천 가까이에 있었다.

여수천이 합류하는 도촌동과 야탑동에는 70여기가 집중돼 있다. 고인돌은 탄천을 따라 남쪽으로 사송동.서현동.분당동.수내동.정자동 등에서 잇따라 발견됐다.

2000여년 전부터 분당을 포함해 탄천 주변으로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는 증거다. 이들은 탄천에서 고기를 잡았고 인접한 얕은 구릉에서 농사를 지었을 것이다. 사송동에선 고기잡이에 사용한 어망의 추가 발견됐다.

고인돌은 외형에 따라 두 종류로 크게 나뉜다. 탁자식과 바둑판식. 탁자식은 잘 다듬은 받침돌(고임돌)로 땅 위에 묘실(시신을 안치하는 곳)을 설치하고 그 위에 넙적하고 큰 뚜껑돌(덮개돌)을 얹힌다. 뚜껑돌 길이가 5m 이상인 것도 있다. 무게는 수십 t이나 된다. 이러한 거대한 무덤을 만들기 위해선 수십 명이 몇일 간 빰을 흘려야 했다. 역사가들은 해당 지역사회의 우두머리 무덤일 것으로 추측한다.

고인돌하면 대부분 이런 큰 규모의 탁자식을 떠올리지만 조그많고 아담한 바둑판식 고인돌도 많다. 우두머리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 무덤이다. 받침돌로 조그만 돌덩어리를 몇개 놓고 그 위에 길이 1m 정도되는 뚜껑돌을 올렸다. 시신이 야생동물 등에 의해 손상되는 것을 막기위해서다. 대개 묘실은 땅 속에 있다.

성남시에서 탁자식 고인돌은 발견되지 않았다. 거의 작은 바둑판식이지만 큰 규모의 고인돌도 여럿 있다.

태평동.수진동의 경우 고인돌과 인접한 곳에서 무문토기 조각들이 많이 발견됐다. 무덤 주인공들이 살았던 곳이다.

도촌동의 한 고인돌 표면에는 군데군데 둥그렇게 파인 홈이 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성혈(性穴)이라고 부른다. 여성의 생식기를 상징해 만든 고대인의 예술적 표현물로 생각된다. 종족의 번식, 즉 다산(多産)을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송동 고인돌은 탄천 서쪽의 논 경작지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부근엔 탄천 변을 따라 충적평야가 길게 형성돼 있다. 고인돌들이 계곡 입구에 있어 탄천 범람으로 무덤의 하부 구조가 크게 손상됐다.

성남의 고인돌 유적은 대부분 발견 직후 사라졌다. 신도시 및 고속도로 개발 때문이다. 분당 중앙공원에 도촌동.분당동서 발견된 것들이 옮겨져 있을 뿐이다. 여수대교 인근의 사송동 고인돌 유적지는 비닐하우스 등으로 가로막혀 접근이 어렵다.

성남의 고인돌에선 청동기가 발견되지 않았다. 당시 청동검.청동화살촉 등은 귀한 물건이다. 죽은 자의 후손은 높은 지위에 있었던 조상을 뽐내기 위해 고인돌 속에 청동기를 넣었다. 성남에는 거대한 고인돌을 만들기 위해 많은 사람을 동원할 능력을 가졌거나, 값비싼 청동기를 땅에 묻을만큼 부유한 세력 집단이 없었던 것 같다.

▶고인돌은 어떻게 만드나
= 고인돌은 고이다(밑을 받치어 안정시키다)의 관형사형인 '고인'과 '돌'이 합성된 역사 용어로 '지석(支石,지탱할 지)묘'의 우리 말 표현이다. 고인돌은 받침돌과 뚜껑돌로 이뤄진다. 청동기인들은 무덤에 쓸 만한 큰 돌을 찾아내, 이를 암반에서 떼어 냈다. 갈라진 바위결을 찾아 나무 말뚝을 박고 물을 적신다. 물에 부풀은 나무가 팽창하면서, 돌이 갈라져 떨어지게 한다. 떼어낸 돌 아래 통나무 여러개를 번갈아 끼우면서 밀어 운반한다. 받침돌 위에 무거운 뚜껑돌은 어떻게 올렸을까? 먼저 받침돌 주위에 흙을 쌓아올려 경사진 둔덕을 만든다. 이 둔덕으로 뚜껑돌을 밀어 올린다. 그 후 흙둔덕을 없앤다. 현대인이 기중기가 없던 시절을 감안, 상상해 낸 고인돌 축조법이다.

▶고인돌사회 논쟁
= 사학계에선 수년전 고인돌을 둘러싼 사회발전단계 논란이 있었다. 고인돌사회가 원시사회가 아니라 '지배자(ruler)'가 있었던 발전된 사회였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어떤 이는 국가 성립 전 단계 (chiefdom)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 계층 간 차이가 뚜렷하지 않은 공동체 수준의 사회단계였다는 것이 통설이다. 지배자가 아닌 '지도자(leader)'수준의 수장이 조직을 이끄는 사회였다. 박수동의 만화 '고인돌'에선 석기시대로 그려지고 있지만 그 보다는 발전된 사회였다. 그렇다고 하층민을 옥죄는 관습법과 경찰.군대같은 무력조직을 갖춘 사회는 아니었다. 강상.루상무덤 등 요동지역 고조선 유적과 고인돌의 조성 집단은 구별되야 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