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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당신도 독재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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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 밤샘토론 앵커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 밤샘토론 앵커

“신예리씨 보기보다 뻔뻔하네. 어떻게 여자가 창피한 줄도 모르고 밥 한 공기를 다 먹나?” 새 부서에 발령받아 첫 점심을 먹으러 간 자리였다. 입사 2년 차 신참에게 농인지 진담인지 부장이 던진 한마디는 힘이 셌다. 마치 따귀라도 한 대 얻어맞은 듯 얼굴이 화끈거렸다. 무릇 여자란 반 공기 남짓 먹고 숟가락을 내려 놓는 게 남들 보기에 좋다는 얼토당토않은 설교가 이어지자 나도 모르게 큰소리로 외치고 말았다. “아주머니, 여기 공깃밥 하나 추가요.” 그리곤 그 밥을 꼭꼭 씹어서 한 톨 남김없이 먹어 치웠다. 뻔뻔하게, 창피한 줄도 모르고.

직장내 갑질 법적 처벌 요원 … 그나마 믿을 구석은 연대 뿐 #아닌 건 “아니다” 말할 수 있는 일상의 민주주의 자리잡길

돌이켜보면 그게 시작이었다. 어린 나이에 물정 모른 채 뛰어든 직장 생활 내내, 부당하고 불합리하다고 여겨진 윗사람들의 처사를 또박또박 짚고 넘어간 것 말이다. 새파란 평기자 시절, 기사에 대한 견해 차이로 당시 편집국장과 대놓고 설전을 벌인 적도 있다. 너무 놀라 입을 쩍 벌리고 서 있던 선배들이 달려들어 말리고 난 뒤에 했던 얘기가 지금도 생생하다. “할 말 못 참는 꼬락서니 보니 회사 오래 다니긴 글렀다.”

그랬던 내가 이제껏 30년 가까이 근속할 수 있었던 걸 보면 우리 회사는 참 좋은 일터임에 분명하다. 까마득한 후배가 귀에 거슬리는 말을 쏟아내는 데도 꾹 참고 들어줄 만큼 인덕 있는 분들이 많았던 덕분일 게다. 아무래도 언론사이다 보니 군대식 위계질서가 만연한 대부분 직장보다 상하 간 의사소통이 비교적 자유롭기도 했다. 무엇보다 혈기방장한 20~30대를 지낸 뒤 소위 처세란 것에 조금이나마 눈을 뜨며 나 역시 예전만큼 입바른 소리를 남발하지 않게 된 탓도 클 터다.

최근 모두의 공분을 자아낸 한국미래기술 회장 양진호씨의 폭행 동영상과 기상천외한 갑질 행태를 접하며 내가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 새삼 되새겨보게 됐다.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면 “저 숱한 직원 중 누구 하나 말 한마디 못 하는 게 더 무섭다. 그게 현실이니까…”라는 반응이 많았다. 한 세대 전이나 지금이나 우리네 일터 분위기는 도통 달라진 게 없는 게다. ‘직장인들의 대나무 숲’으로 불리는 ‘블라인드’ 앱과 각종 익명 온라인 게시판에 애끓는 호소가 줄을 잇는 이유다.

사회적 분노에 힘입어 양씨 한 사람을 엄벌한다 한들 앞으로도 영원히 바뀌는 게 없을까 두렵다. 그래서 하는 얘긴데 이참에 아닌 건 아니라고,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할 말은 하는 문화를 뿌리내릴 순 없을까. 작은 갑질을 참다 보면 결국 큰 갑질을 부르게 되니 말이다. 군부 독재를 물리치고 정치적 민주화를 이뤄낸 지도 30여년. 이쯤 됐으면 우리 삶 곳곳에 이른바 ‘일상의 민주주의’도 자리 잡을 때가 된 것 아닐는지.

올 2월 발표된 국가인권위원회 조사를 보면 최근 1년 동안 상사의 갑질을 겪었다는 응답이 10명 중 7명을 넘었다. 너나없이 직장 내 괴롭힘을 겪는다는 건데 현재로선 법적 처벌도 어렵다. 이렇듯 법이 멀 때 그나마 기댈 구석은 연대뿐이다. 누군가 입을 열면 반드시 함께 나서줄 사람이 있을 거란 확신, 그네가 불이익을 당할 때 다들 그냥 쳐다보고만 있진 않을 거란 기대가 있다면 변화는 싹틀 수 있다고 믿는다.

2주 전 방송된 JTBC ‘차이나는 클라스’ 연산군 편을 만들면서 전하려 했던 핵심 메시지도 바로 소통의 중요성이다. 왕권의 폭주를 견제하기 위한 경연(經筵)에 기꺼이 참여해 신하들의 쓴소리에 귀 기울였던 세종과 성종은 성군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반면 경연을 기피하다 못해 직언하는 게 본업인 삼사를 ‘능상(凌上·윗사람을 능멸함)’으로 몰아 사화까지 일으킨 연산군은 폭군으로 전락한다. 그의 비참한 최후는 ‘아니 되옵니다’ 대신 ‘지당하옵니다’만 들으려 했던 대가일 터다. 그러니 조선시대도 아닌 지금, 주변에서 ‘아니다’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부디 자문해 보길 바란다. ‘혹시 내가 일상의 독재자인 건 아닌가?’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밤샘토론 앵커